한국 현대사의 이해 외솝 최현배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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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연보

Ⅱ. 외솔 최현배, 뜨겁고 맵고 꼿꼿한 삶.

본문내용

문과에서만은 입학시험문제에 한국어를 출제하였을 뿐 아니라 선택과목에 넣어 매주 1, 2, 3학년을 2시간씩 강의하였다. 담당은 최현배 선생. 얼마나 열강을 하였든지 항상 강의실 맨 끝에까지 학생들이 빽빽이 들어찼는데도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가운데 선생의 명강의가 진행되었다. (중략) 그리고 오늘날, 연세대학교 교정 언더우드 동상 앞 돌계단 한가운데를 보면, 네모난 화강석에 한글 내리글씨, 영문 가로글씨 '뉴욕에 있는 우리겨레로부터 붙여줌 Donated by Korean friend in New York 1927'이라 쓰고, 그 양쪽에 태극무늬를 새겨 넣은 것이 있는데,…(중략) 이 때 이 영문번역을 당시 정인보, 최현배 두 선생이 맡았다고 하는데, 'Korean friend'를 두고 이를 '민족'으로 할 것인가, '겨레'로할 것인가 장시간 논의 끝에, 순수한 우리말인 '겨레'로 합의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로서는 별로 입에도 익지 않은 이 말을 과감히 썼다는 점에서 어휘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민족주체성을 심어주려는 용의주도함을 느낄 수 있다.」 ----- 문효근(연세대 교수)의 '나의 스승 외솔 최현배' 中
5) 외솔, 신념과 의지의 삶
최현배의 아호는 '외솔', 성삼문이 지은 충절의 시조「봉래산 제일봉에 낙락 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정하리라」에 외솔의 뿌리가 닿아 있다고 일석 이희승(朝鮮日報 1970. 3. 25)은 말한다. 나이 17에 일본에 나라가 합쳐지자 관립 한성 고등 보통학교보다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강습원에 나가기를 더 열심히 한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함남 흥원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심문을 받은 뒤 함흥 형무소에 갇히고도 한글 연구만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끝내 창씨 개명을 않고 일제의 고문관에게 앞가슴을 채여 넘어지면, 외솔은 반드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앞으로 또 한번 넘어졌다고 한다. 기어이 앞으로 넘어져서 오기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언제나 평생을 고집스런 원칙을 지키며, 자신의 의지와 신념대로 한글 연구에 혼임을 기울였다. 그의 나라 사랑을 위한 얼과 고상한 인간적 개성, 꾸준한 학구적 열성, 청렴결백한 생활태도 등이 모두 한글 운동이라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오직 평생을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한 교육과 한글 연구로 보낸 외솔은 죽어도 죽지 않은 참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Ⅲ. 참고문헌
1. 최현배, 1962《조선 민족 갱생의 도》정음사
2. 허웅, 1993《최현배: 우리말 우리 얼에 바친 한 평생》동아일보사
3. 안주홍, 1984〈인간 최현배〉마당社《마당》38호, pp82∼87
4. 김계곤, 1995〈외솔 최현배의 생애와 업적〉《말글생활》3호, pp48∼57
5. 김석득, 1988〈조선 민족 갱생의 도〉외솔회《나라사랑》67호, pp7∼10
6. 문효근, 1988〈나의 스승, 외솔 최현배〉외솔회《나라사랑》67호, pp11∼18
7. 유경환, 1988〈巨面石像 외솔〉외솔회《나라사랑》67호, pp19∼29
8. 조선일보 1970년 3월 25일 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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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06
  • 저작시기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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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05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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