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샤머니즘이란 무엇인가?
1.샤머니즘의 개념 정의
1)샤머니즘의 개념
2)한국적 샤머니즘의 특성
2.한국 무속(巫俗)의 역사
1)한국 무속(巫俗)의 역사
2)한국 무속(巫俗)의 종교사적 지반
3.한국 무속의 정신적 맥락
1)무당의 종류와 성격
2)굿의 종류와 성격 및 내용
3)굿의 목적
4)한국 무속의 정신적 맥락
4.샤머니즘의 구원관
5.한국 교회내에 깃든 샤머니즘적 치유의 개념
II.성경의 구원과 치유
1.예수의 치유
1)사실인가 아니면 신화인가?
2)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이유
2.자유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1.샤머니즘의 개념 정의
1)샤머니즘의 개념
2)한국적 샤머니즘의 특성
2.한국 무속(巫俗)의 역사
1)한국 무속(巫俗)의 역사
2)한국 무속(巫俗)의 종교사적 지반
3.한국 무속의 정신적 맥락
1)무당의 종류와 성격
2)굿의 종류와 성격 및 내용
3)굿의 목적
4)한국 무속의 정신적 맥락
4.샤머니즘의 구원관
5.한국 교회내에 깃든 샤머니즘적 치유의 개념
II.성경의 구원과 치유
1.예수의 치유
1)사실인가 아니면 신화인가?
2)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이유
2.자유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본문내용
고할 정도로 매우 중요했다.
둘째로, 저자들은 이 기사를 기쁜 소식의 일부로 간주했다. 복음서는 성도들의 위안이나 격려를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불신자들의 개심을 위해서 쓰여졌다.
예수의 지상 생활의 말기에 요한은 그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네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이 말씀은 넘치는 확신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나는 네게 그렇게 말했다'라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그의 적들이 예수께 이적들을 요구했을 때 그들을 위해 이적 행하시기를 거적하셨다. 그러나 그는 병자를 치유하실 때 기뻐하셨다.
) 마이클 하퍼, 앞의 책, 23쪽
2)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이유
ㄱ)예수님은 메시야이었기 때문이다.
울스톤과 슈바이처같은 사람들은 이를 부정하고자 했으나 메시야 대망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구절에 따르면, 그가 병자를 치유하실 것이라는 명백한 언급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아마 가장 중요하고 가장 잘 알려진 메시야에 관한 구절은 이사야 53:4-5일 것이다. 그 본문은 메시야에 대해 다음과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누가에 따르면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친히 인용하셨고(눅 4:18-19), 그 날 이루어졌다고 그가 명백히 말씀하신 이사야 61:1-2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께서 오셨다는 표적으로 치유의 기적을 제시하였다.
ㄴ)예수께서는 선지자이셨기 때문이다.
종종 복음서에서는 선지자적인 말씀과 선지자적인 행동사이에 연계성이 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선지자적 전통과 인치한다. 선지자들은 말씀을 선포햇을 뿐만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처럼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말씀을 분명하게 현시해 보이기도 하였다. 유대인의 대망 중의 하나는 주의 날이 오기 전에 치유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다시 오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예수님 당시에는 추자연적인 능력을 보고 누군가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받아 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 것같다.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께서 우직 하나님께로부터 만이 얻을 수 있었을 그녀에 대한 지식을 드러내 보인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예로서 이사야 11:1,5의 중요한 예언도 포함시켜야 한다.
ㄷ)예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셨던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에 대한 순전한 사랑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서는 이것을 마태복음 9:36과 14:14에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병을 낫게 하셨다'라는 말씀을 알고 있다. 어거스틴은 능력의 요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동정과 동일한 자리에 두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이 요소가 전면에 나설 때만 기적들을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ㄹ)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복음서의 전승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치유는 예수께서 단순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서의 산적된 증거의 일부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나오는 추론은 예수께서는 육신으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므로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의 기적들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의의 약점은 예수께서 행하신 것과 비슷한 치유가 구약성경에 나오며, 예수 당시에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에 의해 적지 않은 규모로 치유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사실은 아무 것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께서 치유하신 방법과 그 목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의 치유가 없었더라면 예수께서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의 주장을 의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가해야 할 필도가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병자를 치유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진리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행하신 치유는 위에서 말한 네가지 사실에 기초해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 중에서 몇 가지만 선택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이셨다. 살아있는 말씀은 치유를 포함하는 살아있는 행동에 의해 확증 되었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성육신이셨으며 사랑은 결코 인간의 어려움을 회피하려 하지 않으며 또한 무시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므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예수의 치유에는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이 결합되었다. 예수의 치유는 예언의 성취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수단 이었다. 초대교회는 이를 직감적으로 알고 열정을 가지고 이러한 입장을 추종하였다.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그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기조 설교를 하셨을 때, 그의 사역의 주요한 주제가 되는 것을 언급 하셨는데, 그것은 인류를 '해방시키기' (한글 개역, '자유케 하고')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 주제로 우리는 지금 방향을 돌려야 할 것이다.
2.자유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에서 어떻게 해방시키셨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을 특히 질병, 마귀의 세력, 그리고 죽음 그 자체로부터의 자유라는 말로 표현했다.
해방은 이 영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지만 해방이라는 주제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특히 이 분야에서 행해졌고 나타났다. 이러한 영역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약화 시키는 것이다.
예수의 해방양식은 다른 모든 해방과 달랐다. 그에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예수께서 삼년동안 그리고 마지막때까지 교회를 통하여 하려고 하셨던 여러 면에서 명백히 기조가 되는 말씀은 그의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에서 적절하게 언급되었다. 그 말씀은 짤막하지만 힘있는 말씀이었다. 이사야 61장을 읽은 후에, 그는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한 말씀으로 요약해 주셨다. 이 말씀은 예수가 해방자임을 선푸하는 것이었다. 해방자가 이미 오셨다. 그리고 성령께서 앞에 놓인 임무를 위하여 그에게 기름부으셨다.
둘째로, 저자들은 이 기사를 기쁜 소식의 일부로 간주했다. 복음서는 성도들의 위안이나 격려를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불신자들의 개심을 위해서 쓰여졌다.
예수의 지상 생활의 말기에 요한은 그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네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이 말씀은 넘치는 확신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나는 네게 그렇게 말했다'라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그의 적들이 예수께 이적들을 요구했을 때 그들을 위해 이적 행하시기를 거적하셨다. 그러나 그는 병자를 치유하실 때 기뻐하셨다.
) 마이클 하퍼, 앞의 책, 23쪽
2)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이유
ㄱ)예수님은 메시야이었기 때문이다.
울스톤과 슈바이처같은 사람들은 이를 부정하고자 했으나 메시야 대망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구절에 따르면, 그가 병자를 치유하실 것이라는 명백한 언급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아마 가장 중요하고 가장 잘 알려진 메시야에 관한 구절은 이사야 53:4-5일 것이다. 그 본문은 메시야에 대해 다음과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누가에 따르면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친히 인용하셨고(눅 4:18-19), 그 날 이루어졌다고 그가 명백히 말씀하신 이사야 61:1-2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께서 오셨다는 표적으로 치유의 기적을 제시하였다.
ㄴ)예수께서는 선지자이셨기 때문이다.
종종 복음서에서는 선지자적인 말씀과 선지자적인 행동사이에 연계성이 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선지자적 전통과 인치한다. 선지자들은 말씀을 선포햇을 뿐만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처럼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말씀을 분명하게 현시해 보이기도 하였다. 유대인의 대망 중의 하나는 주의 날이 오기 전에 치유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다시 오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예수님 당시에는 추자연적인 능력을 보고 누군가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받아 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 것같다.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께서 우직 하나님께로부터 만이 얻을 수 있었을 그녀에 대한 지식을 드러내 보인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예로서 이사야 11:1,5의 중요한 예언도 포함시켜야 한다.
ㄷ)예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셨던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에 대한 순전한 사랑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서는 이것을 마태복음 9:36과 14:14에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병을 낫게 하셨다'라는 말씀을 알고 있다. 어거스틴은 능력의 요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동정과 동일한 자리에 두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이 요소가 전면에 나설 때만 기적들을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ㄹ)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복음서의 전승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치유는 예수께서 단순한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서의 산적된 증거의 일부로서 나타난다. 이로부터 나오는 추론은 예수께서는 육신으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므로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의 기적들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의의 약점은 예수께서 행하신 것과 비슷한 치유가 구약성경에 나오며, 예수 당시에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에 의해 적지 않은 규모로 치유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사실은 아무 것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께서 치유하신 방법과 그 목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의 치유가 없었더라면 예수께서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의 주장을 의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가해야 할 필도가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병자를 치유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진리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행하신 치유는 위에서 말한 네가지 사실에 기초해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 중에서 몇 가지만 선택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이셨다. 살아있는 말씀은 치유를 포함하는 살아있는 행동에 의해 확증 되었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성육신이셨으며 사랑은 결코 인간의 어려움을 회피하려 하지 않으며 또한 무시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므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예수의 치유에는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이 결합되었다. 예수의 치유는 예언의 성취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수단 이었다. 초대교회는 이를 직감적으로 알고 열정을 가지고 이러한 입장을 추종하였다.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그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기조 설교를 하셨을 때, 그의 사역의 주요한 주제가 되는 것을 언급 하셨는데, 그것은 인류를 '해방시키기' (한글 개역, '자유케 하고')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 주제로 우리는 지금 방향을 돌려야 할 것이다.
2.자유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에서 어떻게 해방시키셨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을 특히 질병, 마귀의 세력, 그리고 죽음 그 자체로부터의 자유라는 말로 표현했다.
해방은 이 영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지만 해방이라는 주제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특히 이 분야에서 행해졌고 나타났다. 이러한 영역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약화 시키는 것이다.
예수의 해방양식은 다른 모든 해방과 달랐다. 그에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예수께서 삼년동안 그리고 마지막때까지 교회를 통하여 하려고 하셨던 여러 면에서 명백히 기조가 되는 말씀은 그의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에서 적절하게 언급되었다. 그 말씀은 짤막하지만 힘있는 말씀이었다. 이사야 61장을 읽은 후에, 그는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한 말씀으로 요약해 주셨다. 이 말씀은 예수가 해방자임을 선푸하는 것이었다. 해방자가 이미 오셨다. 그리고 성령께서 앞에 놓인 임무를 위하여 그에게 기름부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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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사1단계 국사 요점정리(2017년 직접 작성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