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자유통화제도와 독점적 단일통화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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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자유통화제도와 독점적 단일통화제도 ]3p

[월드컵 속의 市場 ]3p

[미국 證市 역사의 교훈 ]5p

본문내용

증거금제도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생긴 것이며, 1987년의 대폭락을 넘긴 것도 증거금제도의 활용 때문이다. 모순되는 것은 당시의 대폭락에 일조한 것이 연방준비제도 자신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처방법을 몰라서라기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하다 때를 놓친 것이다.
대폭락은 전세계적인 비극이었다. 미국은 30년대를 몽땅 그 후유증을 치유하는 데 썼으나 실패했다. 농업을 포함할 때 실업률은 50%였다. 산업생산량도 줄어들었다. 미국에서 출발한 대폭락은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조선에서는 막 京城과 인천에 시장을 개설했으나 발전하지 못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에서는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공황은 뜻밖에 미국이 영국을 제치고 금융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9월 21일 영국이 금본위제도를 철폐하자 프랑스와 네델란드도 이를 뒤따랐다. 그러나 달러를 보유한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스웨덴, 네델란드의 중앙은행과 민간들은 미국도 곧 금본위제도를 폐지하리라는 예상 하에 자신들이 보유한 달러를 뉴욕시장에 내놓고 금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재할인율은 1.5%로 낮았다.
9월 16일부터 태환이 폭주하더니 9월 30일까지 유출된 금 때문에 미국의 금 보유량이 4억5천만 달러에서 2억7천만 달러로 급강하하였다. 불과 2주만에 40%가 빠져나간 것이다. 연방준비제도는 즉시 외부유출에 대한 조치를 취했다. 10월 9일 뉴욕연방준비은행은 재할인율을 2.5%로 올리고 16일에는 3.5%로 올렸다. 지금까지 연방준비제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가장 큰 폭의 상승이었다. 이 같은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금의 해외유출은 멈추었다. 10월에 최하수준으로 떨어졌던 것이 12월에는 정상수준으로 회복하였다.
그 사이 은행들은 모든 달러 지폐에 대해 금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달러를 금으로 태환할 것을 요구하자 파산하기 시작했다.
10월에만 522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 그후 3개월 동안 875개의 은행이 추가로 문을 닫았다. 1931년 9월부터 불과 5개월 사이에 1천4백여 개의 은행이 쓰러진 것이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3년 3월 6일 은행을 1주일간 문닫게 하고 은행에서 금이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같은 해 4월 5일 루즈벨트는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1백 달러 이상의 가치 있는 모든 형태의 금과 금증서를 지폐로 강제로 바꾸는 대통령령을 발동시켰다. 금을 국유화한 것이다. 그 결과 약 한 달 후인 5월 10일까지 3억 달러의 금과 5억 달러의 금증서가 정부 수중에 들어 올 수 있었다. 루즈벨트는 4월 20일에 금의 해외유출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 같은 조치로 미국은 전세계 금 보유량의 70%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후 미국이 전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대폭락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다. 그 결과 월스트리트의 眞面目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실형을 살았다. 두 가지 주요 변화가 생겼다. 증권거래위원회의 출범과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 Act의 태동이다. 유럽에서는 전쟁준비가 진행되었다. 40년이 되어 미국에서도 전운이 감돌자 월스트리트는 자금줄이 되어 주었다. 처음에는 우호적이 아니었던 월스트리트는 재무부의 노력으로 전쟁채권이 모두 소화되자 안정을 찾기 시작하여 전쟁기간 줄곳 상승하였다.
결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한 대폭락-대공황은 2차대전의 원인이 되었고 해결책이 되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전문가들은 전쟁 특수로 인한 산업생산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 우려는 우려로 끝났다. 전쟁 동안 억눌렸던 소비는 같은 기간에 월스트리트의 안정적 상승으로 인한 저축가치의 상승에 힘입어 분출했다. 배급으로 살던 사람들의 소비심리는 새로 등장한 텔레비전과 트랜지스터로 살아났다. 1950∼60년대에 월스트리트는 다시 살아났다. 이때 대폭락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무사히 지났다. 투자자들의 인구는 저변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점은 방위산업체의 등장이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에 자극 받은 미국이 冷戰기간 동안 가장 주력한 것이 방위산업체였고 이 부분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1970∼80년대에 월스트리트는 새로운 상품을 선보였다. 옵션Option이다. 50∼60년대 저변확대에 공헌한 것이 뮤추얼 펀드의 확대였다면, 70∼80년대에는 옵션의 확대였다. 옵션은 위험을 분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90년대의 IT산업의 등장과 함께 옵션은 월스트리트를 세계의 금융 중심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회고해 보면 1900년 다우존스 산업평균은 70이었다. 유명한 1929년 대폭락 직전에 300이었다가 1930년에 162로 절반이 되었다.
32년에는 다시 70이 되어 1900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2차대전 직전인 1939년에 150으로 올라갔으나 아직 대폭락 전 수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전쟁이 끝난 1945년에 간신히 190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호황으로 240에서 시작한 지수는 1960년에 600을 넘어서고 1970년에 700을 넘어섰다. 1979∼82년의 고금리 시기에 800 언저리에서 주춤하던 지수는 1982년에 드디어 1000을 넘어섰다. 그러나 1992년에 3000을 넘어서고, 다시 불과 3년 만인 1995년에 5000을 넘어서더니, 1999년에는 1만에 도달했다.
20세기 처음 30년 동안 3배로, 다음 40년에 3배, 그 다음 10년에 3배, 그리고 다음 6년에 3배로 오른 것이다. 폴 볼커가 이끈 80년대의 구조조정으로 미국은 그 다음 10년을 번영으로 물들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결과이다. 30년대 영국을 추월하여 제1의 경제대국이 된 미국은 20세기 후반에 일본의 도전을 물리치고 다시 부동의 세계 제1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주력산업이 그때그때 나타나 주었고, 끊임없이 안전장치를 고안해내고 발전시킨 덕택이다. 필요한 때에 구조조정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시장에 맞추어 해내었다는 것도 빠뜨리지 말아야겠다.
김학은 /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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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13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6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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