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그의 완전함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같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은혜로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아서 의인이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은혜의 소명이다. 어떻게 지탱하는가? 이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으로써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머무르게 된다.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요구하는 의무는 하나님을 의존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50억이 모두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일반적 양태가 50억 개별에게 개별화되어서 각사람에게 요구하는 의존, 순종의 특별한 형태가 있다. 이것이 소명이다.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경륜가운데 하나님은 각자가 담당해야 할 개별화된 역할을 염두에 두시고 올바른 관계로 부르셔서 개별화된 양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신다. 바울의 경우는 보편적 의무만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부르셨을 때, 개별적으로 부르신 순종의 양태는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자. 선생은 하나님이 어떤 순종을 하도록 구체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셨는가? 학생들을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학생덕분에 구원받은 것이다. 학생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에 나를 사용하신 것이다. 목사는 왜 은혜로 부르셨는가? 양들을 잘먹이고, 전도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하기 위해서, 목사는 양떼들 덕분에 구원받았다. 양떼들에게 빚진 자이다. 의사는 누구 덕분에 구원받았는가? 환자들 덕분에. 기업가는 고객들 덕분에, 대통령은 백성들 덕분에 구원받았다. 은혜는 카리스이다. 은사는 카리스마이다. 구체성을 띠는 말이다. 은혜가 구체적인 힘으로 나타날 때 카리스마이다. 신학자들은 카리스마를 은혜의 구체화되고 개별화된 양태라 정의한다. 하나님의 카리스로 올바른 관계로 들어간다. 카리스는 우리에게 카리스마로 나타난다. 올바른 관계 속에서 지탱되도록 하기 위해서, 의무를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 카리스는 우리 삶의 활동의 대상을 위해서 주어진다. 이웃을 위해서 우리에게 카리스를 베푸신다. 카리스는 카리스마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염두에 두신 것을 다할 수 있도록 하시는 힘. 의사는 치료할 수 있는 기술, 선생은 잘 가르치는 힘, 경영자에게는 경영능력, 고객들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소명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부르심은 의인되게 함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덧입게 하는데, 어떻게 지탱이 되는가? 주권자적 목적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우리가 종착역이 아니다. 우리를 통해서 다음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누구를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의 빚진 자로 생각해야 한다. 은혜는 구체적으로 카리스마로 나타난다. 내게만 특별히 요구하는 것이 있다. 카리스마도 은혜이다. 나의 삶의 활동의 대상 때문에 구원을 받는데, 그것이 직업이다. 자기 삶의 활동의 대상에게 빚진 자로 생각하고, 자기 주장을 못하고 오로지 섬긴다. 그러므로 죄인들의 관계는 자기 주장, 자기이익을 위한다. 그러므로 불의하다. 이웃보고 나를 섬겨라, 어떻게 하면 이웃을 착취하는, 이리 떼 노릇하는 관계는 갈등, 싸움의 관계이기 때문에 고난의 관계이다.
의인관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이고 이웃에 대해서 섬김의 관계이다. 사랑의 관계이고, 샬롬, 의로운 관계이고 자유함의 관계이다. 이것이 의인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목적에 순종하는 자이다. 섬김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은 섬김으로써 가능하다. 만인은 만인에게 섬김의 관계, 빚진 자의 관계이다.
더이상 그 관계를 포기하면 화가 미친다. 지쳤으니까 그만하면 올바른 관계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아담의 죄를 짓게 된다. 고전9:16절 화만 있다.
직업을 포함한 모든 활동은 구원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활동의 대상에게 빚진 자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임으로 그도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가 지탱되게 하기 위한 순종의 장으로 직업을 생각해야 한다. 돈을 벌어서 쾌락의 장르로 본다면 인격이 상품화되어 버린다. 직업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면 서로 돈을 많이 빼앗으려고 하게 된다. 삶의 보람이 없다. 죄인들의 관계이다.
의인의 관계는 다르다. 직업이 구원의 과정이다. 대상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전적으로 섬김, 그때 기업가의 착취가 가능하겠는가? 목사가 대접받으려 하고 목에 힘주겠는가? 의사가 환자를 돈벌이의 기회로 보겠는가?
그러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은혜의 소명이다. 어떻게 지탱하는가? 이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으로써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머무르게 된다.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요구하는 의무는 하나님을 의존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50억이 모두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일반적 양태가 50억 개별에게 개별화되어서 각사람에게 요구하는 의존, 순종의 특별한 형태가 있다. 이것이 소명이다.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경륜가운데 하나님은 각자가 담당해야 할 개별화된 역할을 염두에 두시고 올바른 관계로 부르셔서 개별화된 양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신다. 바울의 경우는 보편적 의무만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부르셨을 때, 개별적으로 부르신 순종의 양태는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자. 선생은 하나님이 어떤 순종을 하도록 구체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셨는가? 학생들을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학생덕분에 구원받은 것이다. 학생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에 나를 사용하신 것이다. 목사는 왜 은혜로 부르셨는가? 양들을 잘먹이고, 전도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하기 위해서, 목사는 양떼들 덕분에 구원받았다. 양떼들에게 빚진 자이다. 의사는 누구 덕분에 구원받았는가? 환자들 덕분에. 기업가는 고객들 덕분에, 대통령은 백성들 덕분에 구원받았다. 은혜는 카리스이다. 은사는 카리스마이다. 구체성을 띠는 말이다. 은혜가 구체적인 힘으로 나타날 때 카리스마이다. 신학자들은 카리스마를 은혜의 구체화되고 개별화된 양태라 정의한다. 하나님의 카리스로 올바른 관계로 들어간다. 카리스는 우리에게 카리스마로 나타난다. 올바른 관계 속에서 지탱되도록 하기 위해서, 의무를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 카리스는 우리 삶의 활동의 대상을 위해서 주어진다. 이웃을 위해서 우리에게 카리스를 베푸신다. 카리스는 카리스마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염두에 두신 것을 다할 수 있도록 하시는 힘. 의사는 치료할 수 있는 기술, 선생은 잘 가르치는 힘, 경영자에게는 경영능력, 고객들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소명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부르심은 의인되게 함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덧입게 하는데, 어떻게 지탱이 되는가? 주권자적 목적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우리가 종착역이 아니다. 우리를 통해서 다음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누구를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의 빚진 자로 생각해야 한다. 은혜는 구체적으로 카리스마로 나타난다. 내게만 특별히 요구하는 것이 있다. 카리스마도 은혜이다. 나의 삶의 활동의 대상 때문에 구원을 받는데, 그것이 직업이다. 자기 삶의 활동의 대상에게 빚진 자로 생각하고, 자기 주장을 못하고 오로지 섬긴다. 그러므로 죄인들의 관계는 자기 주장, 자기이익을 위한다. 그러므로 불의하다. 이웃보고 나를 섬겨라, 어떻게 하면 이웃을 착취하는, 이리 떼 노릇하는 관계는 갈등, 싸움의 관계이기 때문에 고난의 관계이다.
의인관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이고 이웃에 대해서 섬김의 관계이다. 사랑의 관계이고, 샬롬, 의로운 관계이고 자유함의 관계이다. 이것이 의인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목적에 순종하는 자이다. 섬김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은 섬김으로써 가능하다. 만인은 만인에게 섬김의 관계, 빚진 자의 관계이다.
더이상 그 관계를 포기하면 화가 미친다. 지쳤으니까 그만하면 올바른 관계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아담의 죄를 짓게 된다. 고전9:16절 화만 있다.
직업을 포함한 모든 활동은 구원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활동의 대상에게 빚진 자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임으로 그도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올바른 관계가 지탱되게 하기 위한 순종의 장으로 직업을 생각해야 한다. 돈을 벌어서 쾌락의 장르로 본다면 인격이 상품화되어 버린다. 직업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면 서로 돈을 많이 빼앗으려고 하게 된다. 삶의 보람이 없다. 죄인들의 관계이다.
의인의 관계는 다르다. 직업이 구원의 과정이다. 대상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전적으로 섬김, 그때 기업가의 착취가 가능하겠는가? 목사가 대접받으려 하고 목에 힘주겠는가? 의사가 환자를 돈벌이의 기회로 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