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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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죽음에 대한 사유가 가닿은 한 귀결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시대여러 시에 편재하는 그 숱한 '그'의 죽음들은, 결국 이 세계의종언을 묵시(默視)하고 묵시(默示)하는 상징적 형식이라고 할 수있다. 기형도 시에서 보았던 '그'의 참혹한 죽음에 대한 차갑고 건조한 묵시(默視)는 '그'로서 상징되는 지금 이 세계에 대한 묵시록(默視錄)적 전망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묵시(默視)에서 '그'의 세계에 대한 묵시(默示)로 이어지는 길은, 상징적 죽음의 형식이 나아가는 시적 행로이다. 그것은 지금 이 세계에 대한거부의 한 극단적 형태이며, 지금 없는 세계에 대한 강렬하고도 처절한 동경의 드러냄이다. 프랭크 커머드의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의 관점의 일부를 빌리면, 종말의식과 묵시록적 전망은 혼돈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에 응전함으로써 존재의 불안감을 극복하기근본적이며 보편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하나의 허구이다. 종말의식은 자기 시대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반복되어온 인간적 사유가 빚어낸 상상적 시간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려운 사유, 이러한 문학적 허구가 갖은 비판적 활력과 깊이그리고 상투성을 동시에 점검하는 것이다.
묵시록은 현대의 '부조리(the absurd)'의 일부이다. 이 점이 묵시론이 갖는 활력, 묵시론이 우리의 격정과 욕구의 집합과 일치하는 데서 생기는 활력을 증언한다. 지식인의 회의에 의해 인준되고제약되는 가운데, 묵시론은 비록 비꼼과 거부의 대상이 될 경우에도 예술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영속적인 위기의 문학이 지닌 영속적인 일면이다. 묵시론이 신화가 되고 우리가 그 과거를 망각할 때우리는 곧장 신화의 상투적 틀(stereotype)로 전락한다.
프랭크 커머드,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 문학과지성사,
133쪽.
김현은 기형도에 대한 글에서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갈까봐 두렵다"라고 말했지만 많은 시인들이,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잠재적인 시인들이, 기형도의 길을 가는 우리 시에는 불길하다.
왜 그토록 많은 시인들이 죽음의 이미지에 경도되고 묵시록적 전망을 은밀하게 내비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역사적인 사태일지도 모른다. 묵시록적 전망은 지금 있는 시간을 전복하고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시를 움직이는 인간정신의 움직임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그것은 계몽주의적 노력과 좌절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역사의진보라는 신념이 벽에 부딪치고 어떠한 전망도 허용되지 않는 혼돈의 시대에 그것은 고개를 든다. 그러므로 계몽주의자들에게 묵시론적 운동은 퇴폐적이고 퇴행적인 정서의 발산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계몽주의는 자신의 논리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을 강요받고 있으며, 기형도와 그의 문학적 동지들은 이 시대적 징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자들이다. 상징적 죽음의 형식이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전망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실존적 갈증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묵시론'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기독교 내부에 결정론적인 종말론의 사유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 모두 이러한 사상, 이념에 경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들의 묵시록적전망은 죽음 이후의 찬란한 세계의 표상을 들어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단지 죽음과 종말의 의식만이 두드러진다. 우리가 시의 표면에서 검출하는 것은 현세의 부정성에 대한 환멸의 정서일 뿐이다. 환멸의 정서는 어떤 시인들의 경우 불교적·도교적 사유와 관련을 맺고 있는 듯이 보이며, 많은 시인들의 경우 기독교적인 묵시록적 전망과 불교적인 사유가 혼재되어 있다. 이 세계의 종말이'신의 왕국'의 시작을 의미하고, 죽음이 생로병사의 고통 없는 '니르바나'의 단계를 의미한다는 종교적 관점은 명료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기독교적인 묵시론의 맥락에서 보면, 지금 이 세계의 타락과혼란도 신의 계획에 의한 것이며 그것을 절멸시키고 새로운 세계를만드는 것 역시 신의 계획의 일부이다. 기독교적인 묵시론은 현세에 대한 부정적 사유를 아무리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하더라도그것은 초월적 실재에 대한 믿음안에서 이獰沮愎  어쨌든 죽음을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현세의 시간과는 다른 차원의 시간을 사유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 인간의 역사가 인간의 부단한자기계발을 통해 완성으로 나아간다는 계몽주의의 직선적 시간관에대한 전복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시쓰기에 대한 우리들의 읽기는 산업문명 비판이라는 표면적인 관찰에서 벗어나 그 안에 내재한 인식론적 기반에 대한 보다 엄밀하고 심층적인 논의로 나아가야한다. 그것은 또한 역사의 종언을 부르짖는 저 난폭한 허무주의와어떻게 싸울것인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환멸의 시대 속에서희망의 씨앗을 발견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가령, 발터 벤야민은 속류 계몽주의의 유산인 '위장된 진보'를 정지시키고 파국의 역사를구원할 희망을 초월적인 메시아에게 걸었으나, 그의 삶 역시 '상징적 죽음'으로 마감되었다. 우리는 아직 벤야민과 기형도의 시대를,그 종말론적 역사를 살고 있다. 현재적·실존적 종말론의 입장에선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보편사 속에서 네 자신을 살피지 말아라. 도리어 너는 네 자신의개인적인 역사 속을 들여다보라. 항상 네 현재 속에 역사의 의미가있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방관자로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책임적인 결단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매 순간속에 종말론적보편사 속에서 네 자신을 살피지 말아라. 도리어 너는 네 자신의개인적인 역사 속을 들여다보라. 항상 네 현재 속에 역사의 의미가있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방관자로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책임적인 결단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매 순간속에 종말론적인 순간이 되는 가능성이 잠들고 있다. 너는 그것을 불러일으켜야한다.
루돌프 볼트만, {역사와 종말론}, 대한기독교서회, 196쪽.
여기서 나는 더 자세한 논의를 멈춘다. 이제는 '오래된 서적(書籍)'의 '검은 페이지'를 덮고 싶기 때문이다. 두렵다.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으니……
(필자 : 문학평론가)
아 사 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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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19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7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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