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의 생업과 식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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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一. 서 언

二. 자연자원의 획득
1. 식용식물
2. 수 렵
3. 어로

三. 농경생활의 영위
1. 논농사와 밭농사
2. 수전의 입지와 구조
3. 경작
4. 수확·탈곡
5. 저장

四. 식생활

본문내용

약 143g 정도이다. 그렇다면 하루에 필요한 양은 430g이 되고 1년이면 157kg에 이른다. 登呂유적의 조사에서 동일시기의 주거인원은 총 60인 정도로, 1년이면 65,700합(9,400kg)이 소비된다. 登呂유적의 수전면적은 대략 2만여평으로, 100,000합(14,300kg) 정도의 수확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분석한 乙益重隆氏는 마을에서 소비하고 남는 최소한 30,000합 이상은 다음해의 종자나 비축물자 혹은 교환물자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유적에서 이와 같은 여분이 계상되지는 않고 대개는 자체 수요의 50% 수준에 머물렀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乙益重隆, 1978)
이를 관창리유적에 적용해 보면, 곡부의 가용가능한 수전면적은 약 7,000평, 산출량으로는 35,000합(5,000kg)이 계상된다. 동시기의 주거지는 약 20기 정도로 주거당 평균인원을 3.5인으로 보았을 때, 전체구성원은 70인, 이들이 1년 내내 쌀만 먹었다고 가정할 경우, 필요로 하는 양은 약 76,000여합(약11,000kg)이 되어, 전체소비량의 절반정도가 쌀로서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쌀이 주식으로서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여 식생활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겠지만 이와 관련해서 먹는 방법에 대한 기록은 미미한 형편이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인이 식사를 할 때, 俎豆(조두)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俎가 소반형태의 상을 일컫고, 豆는 나무로 만든 고배를 의미하고 있음을 본다면 목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匙箸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한편, 왜인전에도 '음식을 먹을 때는 豆를 사용하여 손으로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은 대나무로 만든 고배를 뚱하고 豆는 나무로 만든 고배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식용기로서 목기사용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만 식사도구인 匙箸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자비용토기에 남아있는 조리흔적으로 보아 주로 쌀로서 죽이나 밥을 지어먹거나 기타 스프류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어떠한 형태로든가의 식사도구는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이다. 무문토기유적에서 주전자형토기가 출토되고 있음을 보더라도 식생활에 실제 사용된 도구는 매우 다양하였을 것이다. 단지 이들이 목제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저습지에 대한 조사성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최근 조사된 일본 岡山市 南유적에서는 彌生中期에 해당하는 목제 포크가 발견되었다. 실제 식사시 사용된 것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식생활에 여러 형태의 도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하겠다.
五. 결어
고대의 생업에 대한 연구는 대상은 비록 방대하지만 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오랫동안 연구대상에서 도외시되어져 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에 이에 대한 연구가 차츰 활기를 띠면서 앞으로 고고자료의 중가여부에 따라 괄목할만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너무 방대한 분야를 한꺼번에 다루다보니 구체적인 중거를 제시하거나 제대로 논증하지도 못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별고를 통하여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풀어나갈 생각이다. 이점 양해를 구하며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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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발굴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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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20
  • 저작시기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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