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여(하나님의 완벽한 통치가 임하는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나가야 할 것이다.
작금의 한국 기독교는 상황윤리로 교회를 운영하며, 그것을 은혜로 돌리며 자기 함리화 하여 지기 정당화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상황윤리자들은 그 상황에 따라서 윤리의 규범이 달라지는데 그렇게 되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권위를 유지 할 수가 없게 된다.
기독교 윤리란 하나님의 계명을 그 상황의 표준으로 삼았는데 그 계명을 상황윤리로 돌리게 되면 기독교의 독특성과 하나님의 절대성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계명을 그 상황의 표준으로 삼았는데 그 계명이 없으니까 완전히 방임주의가 되고 주관주의가 된다. 선악과 정의의 판단을 하나님에게서 자기에게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니 선한 표준은 없어지고 자기 생각이 표준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경우 선악의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고 또 그 계율에 얽매어 사는 것과 그 계율대로 자원하여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의 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함으로 자원하여 순종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인간의 이성은 창녀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은 그 속에 구속하는 은혜가 없이는 그 사람은 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 윤리 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다.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항상 기도하고 실천하여, 이 땅에 참된 기독교 문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윤리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인의 자세인 것이다.
작금의 한국 기독교는 상황윤리로 교회를 운영하며, 그것을 은혜로 돌리며 자기 함리화 하여 지기 정당화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상황윤리자들은 그 상황에 따라서 윤리의 규범이 달라지는데 그렇게 되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권위를 유지 할 수가 없게 된다.
기독교 윤리란 하나님의 계명을 그 상황의 표준으로 삼았는데 그 계명을 상황윤리로 돌리게 되면 기독교의 독특성과 하나님의 절대성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계명을 그 상황의 표준으로 삼았는데 그 계명이 없으니까 완전히 방임주의가 되고 주관주의가 된다. 선악과 정의의 판단을 하나님에게서 자기에게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니 선한 표준은 없어지고 자기 생각이 표준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경우 선악의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고 또 그 계율에 얽매어 사는 것과 그 계율대로 자원하여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의 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함으로 자원하여 순종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인간의 이성은 창녀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은 그 속에 구속하는 은혜가 없이는 그 사람은 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 윤리 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다.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항상 기도하고 실천하여, 이 땅에 참된 기독교 문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적 윤리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기독인의 자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