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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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아카데미 영화제

2. 칸 영화제

3. 베를린 영화제

4. 베니스 영화제

본문내용

구인들은 동양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는 서구만의 전유물이며, 동양에서는 이 복잡한 메카니즘을 가진 영화를 다룰 수 없거나, 설령 제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거의 수준 이하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구로자와 아키라는 그런 서구의 편견을 뒤집었고, 또한 자격지심에 빠진 동양의 영화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우리나라의 나이 많은 영화인들은 <씨받이>가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기 전까지 얼마나 자주 구로자와 아키라를 이야기했던가?)물론 <라쇼몽>은 텍스트로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베니스 영화제에서 51년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이러한 파격적인 사건은 66년에도 벌어졌다. 지로 폰테크르번 감독이 연출한 <알제리 전투>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잔인한 식민지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영화였다. 이 영화의 철회를 프랑스는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나 베니스 영화제측은 그대로 강행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대표단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전원 철수 했는데, 이 때 남은 프랑스 대표단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가 프랑수아 튀르포이다. 결국 베니스는 이 영화에 그랑프리를 안겨주었다. 또한 89년에는 대만 감독 후 샤오시엔의 <비정성시>에 그랑프리를 주어 아시아 영화의 가능성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말하자면 베니스 영화제는 꼭 그것이 정책적이거나 의도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비교적 다른 영화제에 비해서 제3세계 영화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영화에 호의를 베푸는 편이다.
60년대 들어와서 베니스 영화제는 그 성격상 독특한 변혁을 하게 된다. 집행부에서는 모든 상을 폐지하고 공평한 심사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건 바로 당시 집행위원장 루이지 키아리니의 제안이었는데, 모든 상업적인 개념을 타파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경쟁체제의 수상제도를 없앰으로써 수상의 민주화는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다른 참가국들은 경쟁이 없는 성격에 흥미를 잃어 점점 다른 경쟁 영화제에 참가하는 등 발길이 끊기는 현상이 발생했다. '황금사자상'등 수상제도를 폐지한 것은 영화제 운영에 심각한 손실을 초래했다. 상이 없다면 참가할 의의가 없다고 생각한 여러 나라들이 칸이나 베를린등 다른 경쟁 영화제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1972년 베니스 영화제는 지구상에서 잠시 사라지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다가 1979년 당시 위원장 카를로리자니는 베니스의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황금사자상'과 수상제도를 부활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1980년부터 경쟁위주의 영화제가 되어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국영화로는 87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이후 두번째로 2년 전 제 56회에서 본선 경쟁 부분에 진출한 <거짓말>이 공식 상영되었다.
출처:
http://ich777.pe.kr/write/61.htm
http://ich777.pe.kr/write/62.htm
http://ich777.pe.kr/write/63.htm
http://ich777.pe.kr/write/6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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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23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7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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