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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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게 죄가 있지 민중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민중신학자들은 죄를 사회 정치적 범주로 보지 개인적 범주로 보지 않는다. 민중이 거룩하고 죄가 없다면, 자연히 민중경험은 신학의 규범이 된다. 그러나 민중은 죄 없는 존재가 아니다. 민중은 지배층에 의해 순화되었기 때문에 지배층과 같은 마음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들 가운데 더 약한 사람들을 억압한다.
민중과 같이 일했던 나의 경험으로 볼 때, 나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만큼 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중신학은 사회 정치적 범주로서의 죄를 강조함으로써, 다른 해방의 신학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죄를 무시하는 경향을 띤다. 나는 민중신학에서 사회적인 죄와 개인적인 죄가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조적인 죄를 강조하는 것이 꼭 개인적인 죄에 대한 관심을 막아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지한 신학에서는 양쪽 모두 다 같이 가야 한다.
민중에 대한 당파적 접근은 또한 신적인 사랑의 개념과 충돌한다. 성서는 확실히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약속을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그들 편에 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보편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안병무는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사랑을 거부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의 당파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의 당파성은 신적 본성의 심오함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병무는 하느님의 사랑은 당파적이지 기호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민중신학자들이 주장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당파성이 주는 중요한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안병무는 나에게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여전히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하느님이 우선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견해를 더 선호한다. 신은 정의 자체부터가 보편적인 분이고 부분을 넘어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 그렇지만 사랑이 더 '필요'한 자를 먼저 사랑하신다. 아기에게 어른보다 더 주의가 필요한 것처럼, 약하고 가난한 민중에게도 하느님의 관심과 뒷받침이 부유한 자와 편한 자에게보다 더 필요하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부유한 자와 권력 있는 자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니다. 지배자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 자체로 심판을 의미하고, 민중에게는 그 자체로 해방을 의미한다. 내가 우려하는 점은 민중신학이 하느님의 사랑을 선별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에 있다. 민중과 하느님의 사랑을 전일적인 관점으로 볼 때, 민중해방이 곧 지배자의 해방도 뜻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적 사랑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민중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사랑이 모든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권과 인간중심주의
역사적으로, 한국의 지배계급들은 민중을 비인간화시켰다. 해방운동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민중의 비인간화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시도는 인간성을 신성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동학(천도교)의 정수는 인간성을 그런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의 핵심적 가르침은 인내천 사상에 있다. 그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가르친다. 이는 우피니샤드 안의 아트만-브라만 사상과 거의 상응한다. 인간 영혼의 본질적 속성은 곧 하느님의 속성이다. 인간성의 속성을 이렇게 신성화함으로써, 동학은 민중의 인권을 회복하려는 경향을 띤다. 민중이 전체주의적 체제에 의해 억압받고 동물처럼 취급당할 때에 이런 주장은 참으로 고귀하고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인내천 사상 때문에 민중신학은 인간중심주의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성을 신성의 수준으로 이상화하는 것은 기독교의 일반적인 이해와는 정면으로 부딪친다. 그런 이상화는 우상숭배의 죄로 간주되어 왔으며, 우상숭배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악한 죄 중의 하나이다. 인간성과 신성을 분명히 구분 짓는 것이 유대-크리스천 전통의 오랜 경향이다.
그러나 인내천 사상의 위험성은 거기서만 그치지 않는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인간성의 중요성을 더 깊이 추구하려 한다. 민중신학자들은 마치 한국의 신(新) 종교 중의 하나인 증산교가 그렇게 했듯이 아예 인간성을 신성 위에 놓으려는 사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증산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성이 신성 위에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은 민중의 필요를 채워 주는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 민중이 하느님보다 우위에 설 때, 인간중심주의의 위험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이 민중의 종이 되는 반면, 민중은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주체가 된다. 민중신학은 인간의 위치를 과장하는 고유의 종교적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시도도 철저히 피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라 단지 하느님의 형상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민중신학이 이런 유혹을 극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마무리지으면서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해방 투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책에서 지적한 몇 가지 우려 점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민중신학들은 한국의 민중경험의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인 흐름에 단순히 응답하기만을 원한다. 안병무가 나에게 말해 준 것처럼, 민중신학자들은 가능한 한 개념화를 피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개념화는 민중경험의 역동성을 죽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안병무와 다른 민중신학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면서, 나는 민중신학자들과 전통적인 서구신학자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양적 사고방식은 포괄적이고 유기적이며, 생각보다는 행동을 강조하며, 마음보다는 몸에 관심을 둔다. 안병무 교수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서양 사람들은 마음으로 알지만, 동양 사람들은 몸으로 안다. 그렇다고 민중신학이 관념이나 형이상학을 거부한다는 말은 아니다. 민중신학자들이 형이상학을 거부한다면, 서구 철학식의 형이상학을 거부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들이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면, 서구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는 말이다. 나는 민중신학이 사실은 형이상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형이상학은 'I Ching' 속에서 발견되는 변화의 형이상학이다. 민중신학은 동양적 사고방식에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전일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역동적이다.

키워드

  • 가격2,3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2.10.24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8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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