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지하생활자의 수기
본문내용
이미 선악의 구 별이 불가능한 태초의 순수한 상태로의 회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지상의 것을 초월한 채 지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천사같이 순수하 고 고결한 영혼을 지닌 아이들이다. 우리는 앞서, 드미뜨리의 사고가 아이의 그 것과 비슷하다고하여 그를 신의 세계에 근접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면 에서 알료샤의 영혼은 무엇보다도 고결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또 다른 패러디 인 조시마 장로와 더불어 소설 내에서 사상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신앙은 직관적이고 선험적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주인공인 알료샤는 '까라마조프네 가족'의 기질을 전혀 가지 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본능적인 신앙에는 까라마조프적 기질 인 열정이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때론 다듬어지지않은 채 겉으로 표출되기도 한 다. 이반은 알료샤에게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역설하며 이들을 괴롭히는 악한을 총살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알료샤는 나직이 '총살형에 처해야죠'라고 수 긍한다. 이반의 말을 들어보자.
좋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너도 대단한 수도사로구나! 그러니까 너의 가슴 속에도 악마의 새끼가 숨어 있는 거야, 알료샤 까라마조프! (위의 책 (상), p.398)
그런데 우리가 이반의 뜻대로 이 말을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알료샤에게 는 까라마조프가의 피가 선한 열정의 모습으로 흐르고 있으며, 그의 본능이 오직 신의 신계만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반이 이성의 힘으로 풀 지 못한 '신의 세계'의 문제는 알료샤의 직관에 의해 가장 궁극적인 해결책의 하 나를 제시하고 있다. 알료샤는 그리스도가 대심판관에게 입맞춤한 것처럼, 이반 의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정의에 대응해 조용히 입을 맞춤으로서 응답했다. 이 들의 입맞춤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논리에 대 한 응답, 가장 그리스도적인 용서의 표현 혹은 부인, 혹은 자신의 논리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도스토예프스키가 찾아낸 시적 출구.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 이 있다. 의미가 어쨌든 간에 이 조용한 입맞춤은 이반과 대심판관의 논리를 중 단 시킬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입맞춤의 의미를 찾으려하나 찾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이미 이성적인 논리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 다.
알료샤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조시마 장로를 간과할 수 없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사상과 감정의 근원은 이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세계 에 있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지상에서 사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 이유가 여기 에 있다. 하느님은 다른 세계에서 씨를 가지고 와서 이 지상에 뿌려 자기의 화원을 가 꾸었다. 그리하여 싹틀수 있는 것은 모두 싹텃으나 자라고 있는 것들은 단지 신비로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 (위의 책 (중), p.67>
고독 속에 머물러 기도드릴 줄 알아라. 대지에 엎드려 기꺼이 땅에 입맞추도록 해 라. 대지에 입맞추고 끊임없는 열정으로 그것을 사랑하라. 그대 환희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그 눈물을 사랑하라. 또 그 환희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것을 귀중히 여기도록 하라. 그것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위의 책 (중), p.70>
조시마 장로는 대지를 사랑하고 범세계적 사랑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한 주인공들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 때 문에 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즉, 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투쟁은 본질적으로 사랑하려는 것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의 싸움이다. 이런 의미 에서 조시마 장로는 어린 알료샤에게 깊은 철학의 근원을 형성시키는 역할을 하 며, 그를 내면적 강인함의 길로 이끄는 장본인이다.
그런데 우리가 환기해야 할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알료샤를 드러내는 방법 역시 매우 조심스럽다는 점이다. 알료샤는 신앙을 지닌 인간의 완전무결한 모습 은 결코 될 수 없다. 그의 신앙은 때때로 유혹의 순간에 직면하곤 하는 데, 그렇 지만 이것은 현실감을 위해 가끔씩 쓰여질 뿐 알료샤를 타락시키는 도구는 되지 못한다. 어쨌든 알료샤는 그의 두 형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삶을 향한 또 하나 의 선한 과정인 것이다.
6)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두 개의 상반된 가치들인 '좋음과 나쁨' '선과 악' 은 지구상에서 수 천년 동안이 나 두려운 주제가 되어왔던 것들이다. 그리고 후자의 가치가 확실히 오랫동안 최고의 위치에 있긴 있었지만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부분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는 그 싸움을 조명해 보고 다만 그 싸움이 얼마나 소 모적이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사용했던 환상적인 렌즈인 것이다. 이반의 정신이 대표하는 악한 것, 알료샤가 대변하는 선한 것은 '이러한 것이 선한 것이고 이러 한 것이 악한 것이다.'라고 단정짓기를 거부한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는 선악에 대한 투쟁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고통과 고뇌의 끊임없는 연속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가 소설 전체에 충만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반의 정신이 파 멸하여 마침내 낡고 병든 것이 물러가면 사랑으로 충만한 새로운 삶이 비로소 시작되리라는 기대이다. 우리는 조시마 장로의 그리스도적 사랑을 이미 알고 있 지만 작가는 그것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조시마 장로는 사상의 틀을 형성 하며 주인공들의 사고를 때때로 보완할 뿐이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작가의 회의 속에서 시작되었고 회의적인 사고들이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 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복음서, 제 12장 24절)
인간은 끊임없이 회의하고 고뇌하도록 내던져져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거대 한 가능성과 같은 것이어서 그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우리의 아름다운 주인공인 알료샤는 '까라마조프네 가족'의 기질을 전혀 가지 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본능적인 신앙에는 까라마조프적 기질 인 열정이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때론 다듬어지지않은 채 겉으로 표출되기도 한 다. 이반은 알료샤에게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역설하며 이들을 괴롭히는 악한을 총살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알료샤는 나직이 '총살형에 처해야죠'라고 수 긍한다. 이반의 말을 들어보자.
좋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너도 대단한 수도사로구나! 그러니까 너의 가슴 속에도 악마의 새끼가 숨어 있는 거야, 알료샤 까라마조프! (위의 책 (상), p.398)
그런데 우리가 이반의 뜻대로 이 말을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알료샤에게 는 까라마조프가의 피가 선한 열정의 모습으로 흐르고 있으며, 그의 본능이 오직 신의 신계만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반이 이성의 힘으로 풀 지 못한 '신의 세계'의 문제는 알료샤의 직관에 의해 가장 궁극적인 해결책의 하 나를 제시하고 있다. 알료샤는 그리스도가 대심판관에게 입맞춤한 것처럼, 이반 의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정의에 대응해 조용히 입을 맞춤으로서 응답했다. 이 들의 입맞춤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논리에 대 한 응답, 가장 그리스도적인 용서의 표현 혹은 부인, 혹은 자신의 논리가 한계에 봉착했을 때 도스토예프스키가 찾아낸 시적 출구.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 이 있다. 의미가 어쨌든 간에 이 조용한 입맞춤은 이반과 대심판관의 논리를 중 단 시킬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입맞춤의 의미를 찾으려하나 찾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이미 이성적인 논리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 다.
알료샤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조시마 장로를 간과할 수 없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사상과 감정의 근원은 이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세계 에 있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지상에서 사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 이유가 여기 에 있다. 하느님은 다른 세계에서 씨를 가지고 와서 이 지상에 뿌려 자기의 화원을 가 꾸었다. 그리하여 싹틀수 있는 것은 모두 싹텃으나 자라고 있는 것들은 단지 신비로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 (위의 책 (중), p.67>
고독 속에 머물러 기도드릴 줄 알아라. 대지에 엎드려 기꺼이 땅에 입맞추도록 해 라. 대지에 입맞추고 끊임없는 열정으로 그것을 사랑하라. 그대 환희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그 눈물을 사랑하라. 또 그 환희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것을 귀중히 여기도록 하라. 그것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위의 책 (중), p.70>
조시마 장로는 대지를 사랑하고 범세계적 사랑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한 주인공들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 때 문에 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즉, 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투쟁은 본질적으로 사랑하려는 것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의 싸움이다. 이런 의미 에서 조시마 장로는 어린 알료샤에게 깊은 철학의 근원을 형성시키는 역할을 하 며, 그를 내면적 강인함의 길로 이끄는 장본인이다.
그런데 우리가 환기해야 할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알료샤를 드러내는 방법 역시 매우 조심스럽다는 점이다. 알료샤는 신앙을 지닌 인간의 완전무결한 모습 은 결코 될 수 없다. 그의 신앙은 때때로 유혹의 순간에 직면하곤 하는 데, 그렇 지만 이것은 현실감을 위해 가끔씩 쓰여질 뿐 알료샤를 타락시키는 도구는 되지 못한다. 어쨌든 알료샤는 그의 두 형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삶을 향한 또 하나 의 선한 과정인 것이다.
6)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두 개의 상반된 가치들인 '좋음과 나쁨' '선과 악' 은 지구상에서 수 천년 동안이 나 두려운 주제가 되어왔던 것들이다. 그리고 후자의 가치가 확실히 오랫동안 최고의 위치에 있긴 있었지만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부분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는 그 싸움을 조명해 보고 다만 그 싸움이 얼마나 소 모적이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사용했던 환상적인 렌즈인 것이다. 이반의 정신이 대표하는 악한 것, 알료샤가 대변하는 선한 것은 '이러한 것이 선한 것이고 이러 한 것이 악한 것이다.'라고 단정짓기를 거부한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는 선악에 대한 투쟁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고통과 고뇌의 끊임없는 연속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가 소설 전체에 충만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반의 정신이 파 멸하여 마침내 낡고 병든 것이 물러가면 사랑으로 충만한 새로운 삶이 비로소 시작되리라는 기대이다. 우리는 조시마 장로의 그리스도적 사랑을 이미 알고 있 지만 작가는 그것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조시마 장로는 사상의 틀을 형성 하며 주인공들의 사고를 때때로 보완할 뿐이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작가의 회의 속에서 시작되었고 회의적인 사고들이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 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복음서, 제 12장 24절)
인간은 끊임없이 회의하고 고뇌하도록 내던져져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거대 한 가능성과 같은 것이어서 그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