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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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화녀]의 포스턴

2. [충녀]

3. [육식동물]의 명자

4. [화녀 82]에서의 명자

5. 性을 재료로 한 영화

6. 권력적인 성관계안의 여성

본문내용

한 게이 남성은 그에게 신체에 대한 일반적 폭행은 물론, 성적인 폭행을 당한다. 이는 권력-성별 구도의 예외 사례이지만 오히려 성적 관계에서 권력관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지적에 대해 김기덕은 그의 권력-성별 구도가 고정적이 아니라고, 지배-피지배의 역할분담이 '바뀌어 왔'다고 말한다.
나는 영화 속에서 늘 남성과 여성에 똑같은 비중을 둔다.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한 쪽도 없는 것이다. 내 영화 속에는 언제나 그런 남성/여성의 구조가 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누가 지배적이 되고 누가 피지배적이 되는가만 바뀌어 왔을 뿐이다. 이번에는 여자가 지배자이지만 그것이 행복한 지배는 아니다. 희진은 '악어' 못지 않게 자폐적인 캐릭터이지 않은가.
그러나 '바뀌어 왔다'고 말하지만, 희진이 용패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감독이 희진이 되어 본 적은 없어 보인다. 감독의 시선은 용패 그대로다. 김기덕은 언젠가 "자신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의 시선이 가부장제의 지평 밖으로 나와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3. 그의 시선 밖의 그녀들의 삶: 이미 있어 온.
<파란대문>에서 여인숙 주인은 진아에게 '우리 모두가 너와 다르지 않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 말을 통해 김기덕은 아마도 구체적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주변부, 같은 계급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그(여인숙 주인)가 그녀(진아)의 삶을 더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적어도 중심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같은 여성(여인숙 주인의 여대생 딸, 혜미)보다는 말이다. (물론 영화는 이 상이한 계급의 여성들의 화해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감독의 미묘한 시선은 여인숙 주인을 애초부터 진아의 삶을 이해하는 캐릭터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삶은 그 사람과 같은 계급에 속한 이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다른 계급에 속한 이보다.' 라는 명제는 어느 경우에나 믿을 만한 것일까? 그는 진아의 삶에 대해 상이한 계급의 여성이 취하는 태도의 일례로서 '펜대를 굴리는' (이른바) 페미니스트(비평가)들에 관하여 언급하기도 하였다.
비판이라면 그것은 페미니스트들이 갖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죠. 글을 쓸 수 있고, 강의를 할 수 있는 삶에 안주하며, 그것만이 인간의 숭고한 가치라고 믿는다면,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김기덕이 그들을 실제로 구원해 낼 것도 아니면서, 오히려 창녀가 창녀임을 더 처절하게 확인만 시킬 뿐인 그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경악하는 거죠. 단지 아예 뿌리칠 수 없는 여자로서의 의무감이 동원되기 때문에, 민감하고 불쾌한 문제이기 때문에 비난하는 거죠. 하지만 그 이상 접근하지 않는 거죠. 실제로 그것이 그네들의 삶이라고 이해하지는 않는 거죠. 그러한 삶의 길을 가게 된 그녀들의 내면의 풍경은 도대체 모르는 거죠. 하나같이 타락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쓸 돈이 없어서 몸을 팔았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내가 <파란 대문> 10편을 만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경지라는 거죠. 어떤 모습이 형성되는 것은 일종의 경지라고 봅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접근하면 되는데 이 사회는 무조건 도덕적이고, 지적이고, 모두가 펜대를 굴리는 것이야말로 숭고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모순을 많이 봅니다.
물론 성매매 여성과 섹스한 경험, 여자를 강간한 경험이 있는 자와 없는 자는 성적으로 학대받는 여성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중심/주변의 구분, 결국 계급 구분으로 이어지는 그 구분에서 같은 계급에 속해 있는 자가 이해하는 진아의 삶과, 다른 계급에 속해 있는 자가 이해하는 진아의 삶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앞의 것이 뒤의 것보다 진정한 이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에 가깝다. 아니면 계급적 이해에 대한 과신, 혹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라는) 상이한 계급의 사람들에 대한 일면적인 배타성의 이면이거나. 우리가 앞서 (2.에서) 살펴본 바 있듯이 아무리 같은 계급에 속해 있다하여도 그 계급 안의 고정된 위계 안에서만 진아를 바라볼 때, 그녀의 삶에 대한 (그의) 이해는 ‘진짜’ 그녀의 삶과는 꽤 거리가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구조 안의 여성들, “인정”받아야만 하는 삶을 산다는 그녀들은 김기덕의 여성들일 뿐이다. 그녀들에게 그것이 유일한 삶의 방식인 것은 김기덕이 그 구조를 필연적인 것으로 긍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김기덕이 그의 영화 속에 담고자하는 '간절한 메시지'는 김기덕 자신의 논리 안에서 순환한다. 그리고 순전히 그의 시선에 의한 이 순환은 다른 시선에 의할 때는 그다지 의미를 갖지 못할 수 있다.
‘그’가 여성의 삶을 그렇게 보고 있으며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을 보여준다고 할 때 그것에 대해 탓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혹은 김기덕에게 '당신이 보는 세상 말고 여러 세상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하는 마음 역시 추호도 없다. 다만 김기덕이 자신의 순환논리에 의한 간절함을 호소하고자 한다면, 그의 영화 속 '다양한' 인생들이 '그'의 시선 안에서 고정된 채 재생산되는 '그'만의 피사체임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의 구도에 따르면 홍상수와 임순례의 영화는 주변의 삶을 그리는 영화인가, 중심의 삶을 그리는 영화인가?) 김기덕이 '이것 역시 하나의 삶이다. 당신들은 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느냐'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같은 계급에 속한 여성이건 아니건 간에 '성계급'에 있어서는, 여성에 대한 자신의 시선이 타계급의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말하는 '당신들'의 눈, 펜대를 굴리는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그녀들에 대한) 이해 역시 하나의 가능한 형태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개 주인이 개를 이해할 필요가 없듯이, 중심은 '주변'의 삶을 이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김기덕에 따르면 오직 개가 개 주인을 이해할 필요만이 있다. 다만 김기덕이 자신의 순환논리에 의한 간절함을 호소하고자 한다면, 그의 영화 속 '다양한' 인생들이 '그'의 시선 안에서 고정된 채 재생산되는 '그'만의 피사체임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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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2.10.29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9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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