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1.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자녀교육
2. 개혁시대에 강조되었던 신앙교육
3. 현재의 영재교육
4.교육의 실재적 방법
결론
1.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자녀교육
2. 개혁시대에 강조되었던 신앙교육
3. 현재의 영재교육
4.교육의 실재적 방법
결론
본문내용
를 내다보았다. 마지막의 우주의
끝은 거대한 불덩어리로 되어지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할 어둠
의 세계라는 것을 내다보았지만 그가 어려서 배웠던 유대인의 신
앙 아래서 세상의 끝은 결코 어둠이 아니라고 독백하였었다. 그
는 그가 발견한 상대성의 원리 아래 세계의 종말까지도 내다보았
지만 그의 영혼에 뿌리내려진 신앙 아래서는 결코 인생의 의미를
하찮은 것으로 돌리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신앙 아래
서 주님을 진실히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신앙 교육의 철저만이
이 세상을 새롭게 할 참된 가치임을 깨달았었다. 내 아이의 두뇌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두뇌 교육함에 있어서 신앙 교육이
필수적임을 자주자주 느낀다. 우수한 두뇌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나의 자녀라 할지라도 나는 아이의 장
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고 미래를 보장해 줄 수도 없다. 우수한
두뇌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지 안식을 줄지 나는 전혀 알 수
도 없다. 나 자신이 바른 인성의 형성 시기에 올바른 가정교육이
없었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한 인격 형성이 있었음을 느끼면서 자
녀에게만큼은 올바른 인격 안에서 보람된 인생을 이끌어 갈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아이로 기르기를 바라는 가운데 우수한 두뇌 교
육에 대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결코 내가 책임지지
못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올바른 신앙 교육만이 이 문
제에 대한 바른 지침을 주리라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 거의 매
일 아침 아이들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는
이 아이에게 주신 재능을 따라 충성된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내가 의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그의 길을 따라 용감히 걸어가기를 바란다. 이것은 우리에게 남
겨 주신 신앙의 선진들의 바라시는 바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을 양
산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과
학과 신앙에 엄청난 모순을 가지고 성장하는데 메스 미디어를 통
한 엄청나게 쏟아지는 진화론적 정보는 일주일에 한번만 실시되
는 신앙 교육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초대 교회의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박해가 진행될 때 기독교적 변증론이 시도
되었었는데 특이한 것은 변증론자들에게서는 순교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같은 현상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과학적 관점과 신앙적 관점의 일치는
결코 이룰 수 없다. 인간의 지식의 완성은 결코 끝을 볼 수 없음
으로 인하여 변증적 사고로는 도저히 믿음의 체계인 신앙 안에서
의 온전한 삶은 결코 유도해 낼 수 없고 끊임없이 표류하는 인간
을 낳거나 자포자기에 이르는 인격을 발생시킬 뿐이다. 신앙은
신앙으로서만 그 문제가 해결되어진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믿음
에 이르게 한다는 성경의 말씀은 2천년이 지난 오늘의 시대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진리이다. 이 신앙 안에 사는 삶
은 오직 사람의 영혼 속에 거주하는 진실한 신앙의 자세에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오직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이 보았던 것처럼
유아 때의 교육으로서 가능하기에 어릴 때,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면 가장 안락을 누리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을 때부터 이러한
관점이 교육되어져야 한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교육은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다. 한때는
어릴 때의 교육이 무시되어지기도 하였고 교육의 발전이 이루어
지고 있는 지금은 전통적인 전달 교육이 무시되어지고 있다. 유
대인은 그들의 체계를 이야기를 통해서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전
달하였는데 이것을 통해 이루어진 암기력은 그들이 이 시대까지
우수하게 살아남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는데 우리는 이러한 교
육의 유익을 간과하고 있다. 교육의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암기
력 교육은 지양되어지고 깨달음에 관한 교육의 우수성만을 강조
하는 형편이다. 초등부나 그 이상의 부서에서는 알고 깨닫고 행
하게 하는 조화 있는 교육이 평행을 이루어야 하지만 더 어린 부
서에서는 암기력에 관한 교육이 치중되어져야 한다. 교육의 필요
성이 강화되어 있는 교회에서는 영아부도 모이게 하고 있지만 어
른들의 예배의 흉내이거나 모아서 놀이에 치중하는 것이 고작이
다. 놀이는 어른들의 예배를 방해하는 아이들이 귀찮게 하는 것
을 방지한다는 이해의 수준에서 진행되어지고 어른 예배를 드리
는 한 시간을 때우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신
앙은 믿음의 선진들이 경험한 과정의 축적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한데 유아들에게 하는 교육의 특별함을 그렇게 많은 피흘림을 통
해서 깨우친 진실들이 오늘날에는 너무나도 심각하게 무시되어지
고 있다.
그렇게도 진리는 많이도 외쳐졌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세상은
변화가 없고 죄악된 세상에 대한 자포자기로 인해 하나님의 관여
하심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마지막 카드라고 신학적인 결론을 내
리기도 한다. 오늘날의 공해 문제, 인종차별 문제, 인간이 삶으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그 해결점이 완전히 포기되어지고 있는 상
황이다. 진정 하나님의 개입하심 없이는 해결 안될 완전한 포기
상태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한 개선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가장 이상적인 방법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창세기의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서의 이상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간직하고자 하는 교육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며 사회문
제를 해결할 완전한 해결책으로 인간이 해야 할 가장 마지막 남
은 유일한 것으로 제시한다. 고린도서에서 바울은 한쪽 부모라도
그리스도의 은총 아래 있을 때 그 자녀도 완전하다는 말을 했는
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아래 거할 때, 자녀에 대한 바
른 교육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할 때 사회나 가정에서 온전한 인
격을 가진 책임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되어질 것이다. 완전한
비전은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고 그것을 이루어 나갈 맑은 눈
망울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우리 뒤를 이어가려 하고 있다.
교회는 크게는 모든 계층에 적용되는 온전한 교육의 방법을 개발
하여야 하며 가르쳐야 하는데 작게는 어머니의 배속에 있는 아이
들에서부터 영아부에 이르기까지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교육
개선에 힘써야 한다.
끝은 거대한 불덩어리로 되어지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할 어둠
의 세계라는 것을 내다보았지만 그가 어려서 배웠던 유대인의 신
앙 아래서 세상의 끝은 결코 어둠이 아니라고 독백하였었다. 그
는 그가 발견한 상대성의 원리 아래 세계의 종말까지도 내다보았
지만 그의 영혼에 뿌리내려진 신앙 아래서는 결코 인생의 의미를
하찮은 것으로 돌리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신앙 아래
서 주님을 진실히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신앙 교육의 철저만이
이 세상을 새롭게 할 참된 가치임을 깨달았었다. 내 아이의 두뇌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두뇌 교육함에 있어서 신앙 교육이
필수적임을 자주자주 느낀다. 우수한 두뇌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나의 자녀라 할지라도 나는 아이의 장
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고 미래를 보장해 줄 수도 없다. 우수한
두뇌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지 안식을 줄지 나는 전혀 알 수
도 없다. 나 자신이 바른 인성의 형성 시기에 올바른 가정교육이
없었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한 인격 형성이 있었음을 느끼면서 자
녀에게만큼은 올바른 인격 안에서 보람된 인생을 이끌어 갈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아이로 기르기를 바라는 가운데 우수한 두뇌 교
육에 대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결코 내가 책임지지
못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올바른 신앙 교육만이 이 문
제에 대한 바른 지침을 주리라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 거의 매
일 아침 아이들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는
이 아이에게 주신 재능을 따라 충성된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내가 의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그의 길을 따라 용감히 걸어가기를 바란다. 이것은 우리에게 남
겨 주신 신앙의 선진들의 바라시는 바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을 양
산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과
학과 신앙에 엄청난 모순을 가지고 성장하는데 메스 미디어를 통
한 엄청나게 쏟아지는 진화론적 정보는 일주일에 한번만 실시되
는 신앙 교육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초대 교회의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박해가 진행될 때 기독교적 변증론이 시도
되었었는데 특이한 것은 변증론자들에게서는 순교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같은 현상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과학적 관점과 신앙적 관점의 일치는
결코 이룰 수 없다. 인간의 지식의 완성은 결코 끝을 볼 수 없음
으로 인하여 변증적 사고로는 도저히 믿음의 체계인 신앙 안에서
의 온전한 삶은 결코 유도해 낼 수 없고 끊임없이 표류하는 인간
을 낳거나 자포자기에 이르는 인격을 발생시킬 뿐이다. 신앙은
신앙으로서만 그 문제가 해결되어진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믿음
에 이르게 한다는 성경의 말씀은 2천년이 지난 오늘의 시대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진리이다. 이 신앙 안에 사는 삶
은 오직 사람의 영혼 속에 거주하는 진실한 신앙의 자세에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오직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이 보았던 것처럼
유아 때의 교육으로서 가능하기에 어릴 때,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면 가장 안락을 누리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을 때부터 이러한
관점이 교육되어져야 한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교육은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다. 한때는
어릴 때의 교육이 무시되어지기도 하였고 교육의 발전이 이루어
지고 있는 지금은 전통적인 전달 교육이 무시되어지고 있다. 유
대인은 그들의 체계를 이야기를 통해서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전
달하였는데 이것을 통해 이루어진 암기력은 그들이 이 시대까지
우수하게 살아남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는데 우리는 이러한 교
육의 유익을 간과하고 있다. 교육의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암기
력 교육은 지양되어지고 깨달음에 관한 교육의 우수성만을 강조
하는 형편이다. 초등부나 그 이상의 부서에서는 알고 깨닫고 행
하게 하는 조화 있는 교육이 평행을 이루어야 하지만 더 어린 부
서에서는 암기력에 관한 교육이 치중되어져야 한다. 교육의 필요
성이 강화되어 있는 교회에서는 영아부도 모이게 하고 있지만 어
른들의 예배의 흉내이거나 모아서 놀이에 치중하는 것이 고작이
다. 놀이는 어른들의 예배를 방해하는 아이들이 귀찮게 하는 것
을 방지한다는 이해의 수준에서 진행되어지고 어른 예배를 드리
는 한 시간을 때우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신
앙은 믿음의 선진들이 경험한 과정의 축적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한데 유아들에게 하는 교육의 특별함을 그렇게 많은 피흘림을 통
해서 깨우친 진실들이 오늘날에는 너무나도 심각하게 무시되어지
고 있다.
그렇게도 진리는 많이도 외쳐졌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세상은
변화가 없고 죄악된 세상에 대한 자포자기로 인해 하나님의 관여
하심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마지막 카드라고 신학적인 결론을 내
리기도 한다. 오늘날의 공해 문제, 인종차별 문제, 인간이 삶으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그 해결점이 완전히 포기되어지고 있는 상
황이다. 진정 하나님의 개입하심 없이는 해결 안될 완전한 포기
상태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한 개선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가장 이상적인 방법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창세기의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서의 이상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간직하고자 하는 교육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며 사회문
제를 해결할 완전한 해결책으로 인간이 해야 할 가장 마지막 남
은 유일한 것으로 제시한다. 고린도서에서 바울은 한쪽 부모라도
그리스도의 은총 아래 있을 때 그 자녀도 완전하다는 말을 했는
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아래 거할 때, 자녀에 대한 바
른 교육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할 때 사회나 가정에서 온전한 인
격을 가진 책임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되어질 것이다. 완전한
비전은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고 그것을 이루어 나갈 맑은 눈
망울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우리 뒤를 이어가려 하고 있다.
교회는 크게는 모든 계층에 적용되는 온전한 교육의 방법을 개발
하여야 하며 가르쳐야 하는데 작게는 어머니의 배속에 있는 아이
들에서부터 영아부에 이르기까지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교육
개선에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