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창경궁의 문 종류
2.역사로서의 경관
(1) 창경궁의 창건
3. 창경궁의 대소사건
4. 선인문의 변
2.역사로서의 경관
(1) 창경궁의 창건
3. 창경궁의 대소사건
4. 선인문의 변
본문내용
다
순종 융희3년 1909경부터 일제시대로 접어들면서 크게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11년 4월 창경궁을 일반에 공개하면서 격을 낮춰 창경원이라고 부르게 한다.
창경궁의 동물원화
이때 통감부의 한 관리가 데라우찌 통감에게 희한한 제안을 한다. <지금 창덕궁은 순종황제가 기거하고 있는 만큼 큰불이라도 일어나기 전에는 손을 댈수가 없으나 그 옆에 있는 창경궁을 대대적으로 개조해 버린다면 일단 유사시에 황제가 피신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행각이나 전각들을 헐어 버리고 그곳에 동물원 과 식물원 그리고 박물관 등을 설치하면 궁궐의 생명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반 시민에게 공개한다면 왕궁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다큐멘타리 서울 정도 6백년 중에서)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긴 이듬해부터 시작하여 그해 가을까지 제1단계의 시설이 끝나 여러 종류의 조수류가 사육되고 정부일에 종사하는 관원들에게도 때로 공람된다.
순종 원년 1907에는 권농장 터에다 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고 연을 심었는데 춘당대앞이라 하여 춘당지라 하였다 그 북쪽에는 일본식 수정을 세우고 수정 뒤에는 식물원을 설치.
자경전 터에는 장서각을 지어 황실도서관을 만들고, 시민당 부근에는 표본실을 지어 각종 식물의 표본을 진열. 궁내에 일본으로부터 벚꽃나무를 갖다심고 1911년 4월에는 일반에게 공개하면서 창경원으로 부르게 했다. 이러는 동안에 60여채의 전각과 궁잠과 궁문들이 헐리고 심지어는 기단 초석까지 파내는등 유구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서울대공원 계획
1977 년 서울특별시에서 서울대공원 계획이 추진되어 창경궁의 동.식물원을 그곳으로 이관하기로 결정함에따라 문화재관리국은 창경궁을 왕궁 본래의 모습으로 재정비하여 국민교육의도량으로 활용하고자 창경궁 중건을 결정.
<중건기본방침>
1.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및 그 주변건물과 명정전 북편의 월랑지를 복원하여 조선왕조의 정전중 가장 오래된 명정전 일곽이원형을 갖추도록 한다.
2.일제시 축조된 표본관을 비롯한 동물사와 유기장시설 및 매점 등 궁궐 양식에 맞지 않는 시멘트 구조물을 철거하고 궁 본래의 동선을 조성한다.
3.조경은 창덕궁후원과 같이 왕궁조원의 특성을 살려 조성한다
4.식물원 본관은 보존하여 한국 고유의 수종과 식물을 수집전시
5.중내에는 매점시설등을 두지않고 봄맞이 야간공개를 금지하여 위락공원 기능에서 궁본래의 기능을 갖추도록 한다.
일제의 풍수 침략(창경궁과 종묘의 수난사>
출발 자체가 비뚤어진 창경원은 이후 시골 사람들의 서울 구경거리의 대명사가 되었고, 젊은이들의 쌍쌍파티 장소로 이용되는등 서울의 부족한 놀이문화 공간을 메우면서 오욕의역사는 잊혀져갔다. 1977년에 서울시의 서울대공원 계획이 추진되어 창경궁의 동물원.식물원을 이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문화재관리국은 창경궁을 원래의 왕궁 모습으로 복원 1986.8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창경궁과 종묘를 원래대로 연결하여 복원하지는 못했다. 일제가 맥을 끊기 위해 둘을 갈라 길을 냈다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창경궁과 종묘는 이렇게 근 1백년을 헤어져 있다.
<창경궁 대온실의 부끄러운 역사>
춘당지를 지나 조금더 걸으면 대온실이 보인다. 일제의 의도적인 문화말살정책의 하나로 개원된 창경궁의 동물원과 식물원중에서 식물원은 그대로 남아 이름만 바뀌어 대온실이 된 모양이다. 궁을 복원하면서 식물원의 존폐 여부를 놓고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고 하나 우리 주권이있던 때에 세워졌고, 최초의 식물원인만큼 보존하자는 견해가 지배적이어서 우리 나라의 고유식물을 보존하는 기능을 하도록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안내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순종 융희3년 1909경부터 일제시대로 접어들면서 크게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11년 4월 창경궁을 일반에 공개하면서 격을 낮춰 창경원이라고 부르게 한다.
창경궁의 동물원화
이때 통감부의 한 관리가 데라우찌 통감에게 희한한 제안을 한다. <지금 창덕궁은 순종황제가 기거하고 있는 만큼 큰불이라도 일어나기 전에는 손을 댈수가 없으나 그 옆에 있는 창경궁을 대대적으로 개조해 버린다면 일단 유사시에 황제가 피신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행각이나 전각들을 헐어 버리고 그곳에 동물원 과 식물원 그리고 박물관 등을 설치하면 궁궐의 생명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반 시민에게 공개한다면 왕궁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다큐멘타리 서울 정도 6백년 중에서)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긴 이듬해부터 시작하여 그해 가을까지 제1단계의 시설이 끝나 여러 종류의 조수류가 사육되고 정부일에 종사하는 관원들에게도 때로 공람된다.
순종 원년 1907에는 권농장 터에다 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고 연을 심었는데 춘당대앞이라 하여 춘당지라 하였다 그 북쪽에는 일본식 수정을 세우고 수정 뒤에는 식물원을 설치.
자경전 터에는 장서각을 지어 황실도서관을 만들고, 시민당 부근에는 표본실을 지어 각종 식물의 표본을 진열. 궁내에 일본으로부터 벚꽃나무를 갖다심고 1911년 4월에는 일반에게 공개하면서 창경원으로 부르게 했다. 이러는 동안에 60여채의 전각과 궁잠과 궁문들이 헐리고 심지어는 기단 초석까지 파내는등 유구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서울대공원 계획
1977 년 서울특별시에서 서울대공원 계획이 추진되어 창경궁의 동.식물원을 그곳으로 이관하기로 결정함에따라 문화재관리국은 창경궁을 왕궁 본래의 모습으로 재정비하여 국민교육의도량으로 활용하고자 창경궁 중건을 결정.
<중건기본방침>
1.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및 그 주변건물과 명정전 북편의 월랑지를 복원하여 조선왕조의 정전중 가장 오래된 명정전 일곽이원형을 갖추도록 한다.
2.일제시 축조된 표본관을 비롯한 동물사와 유기장시설 및 매점 등 궁궐 양식에 맞지 않는 시멘트 구조물을 철거하고 궁 본래의 동선을 조성한다.
3.조경은 창덕궁후원과 같이 왕궁조원의 특성을 살려 조성한다
4.식물원 본관은 보존하여 한국 고유의 수종과 식물을 수집전시
5.중내에는 매점시설등을 두지않고 봄맞이 야간공개를 금지하여 위락공원 기능에서 궁본래의 기능을 갖추도록 한다.
일제의 풍수 침략(창경궁과 종묘의 수난사>
출발 자체가 비뚤어진 창경원은 이후 시골 사람들의 서울 구경거리의 대명사가 되었고, 젊은이들의 쌍쌍파티 장소로 이용되는등 서울의 부족한 놀이문화 공간을 메우면서 오욕의역사는 잊혀져갔다. 1977년에 서울시의 서울대공원 계획이 추진되어 창경궁의 동물원.식물원을 이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문화재관리국은 창경궁을 원래의 왕궁 모습으로 복원 1986.8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창경궁과 종묘를 원래대로 연결하여 복원하지는 못했다. 일제가 맥을 끊기 위해 둘을 갈라 길을 냈다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창경궁과 종묘는 이렇게 근 1백년을 헤어져 있다.
<창경궁 대온실의 부끄러운 역사>
춘당지를 지나 조금더 걸으면 대온실이 보인다. 일제의 의도적인 문화말살정책의 하나로 개원된 창경궁의 동물원과 식물원중에서 식물원은 그대로 남아 이름만 바뀌어 대온실이 된 모양이다. 궁을 복원하면서 식물원의 존폐 여부를 놓고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고 하나 우리 주권이있던 때에 세워졌고, 최초의 식물원인만큼 보존하자는 견해가 지배적이어서 우리 나라의 고유식물을 보존하는 기능을 하도록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안내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