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의 연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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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 글을 시작하면서
1. 태권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태권도에 대한 선입관
2. 태권도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3. 전통무예를 어떻게 볼 것인가?
4. 전통무예의 하나인 태권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5. 한국인의 문화 인식과 태권도의 발전을 위해서

2. 태권도에 대한 논의들
1. 기존의 태권도 교본에 나타나는 태권도사
2. 문제제기와 역사의 객관적 사실
3. 카라테와 태권도의 6대 문파
4. 태권도의 성립과정
5. 태권도사에 접근하는 다른 글들
6. 태권도계의 문제점과 발전 방향
7. 본인이 생각하는 태권도
8. 태권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

3. 태권도 발차기의 원리와 실제 연구
1. 글을 시작하면서
2. 발차기의 원리 연구
3. 기본 발차기의 실제 연구
4. 응용 발차기의 실제 연구
5. 기타
-1. 정확하고 빠르고 강한 발차기를 위한 제언
-2. 발차기로 인한 신체 손상 예방하기
* 회축의 분석 및 응용에 대한 개인적 소견(정회상)
* 태권도 이외의 한국무술들(김성구)

4. 태권도의 아메리카 드림 40년
1장 미국에 씨를 뿌린 사람들
2장 카라테라 불리던 시절
3장 6개 문파의 성립
4장 북으로 간 장군
5장 옮겨간 관의 뿌리
6장 왕국을 꿈꾸는 사람들
7장 유도인들의 변신
8장 서부개척자들
9장 서부개척시대
10장 할리우드의 고수들
11장 베스트 오브 베스트
13장 월남전과 태권도 전사들
14장 무도의 천국으로

본문내용

2년 10월에 만들어진 화랑무도관이었다. 미 포트베니보병학교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제주도 제1훈련소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수석사범은 미국서 귀국한 남태희였고 부사범은 같은 청도관 출신의 고재천이었다. 고재천은 후일 광주교청으로 이동발령이 나 광주에서 청도관의 지부인 청룡관을 냈다. 그는 대령에서 예편된 후 한국에 프로태권도가 시도됐을 때 이를 주도하기도 한다. 수석사범 남태희는 국군에 태권도를 심은 최초의 주역이었다. 해방직후 당수도 청도관에서 이원국으로부터 당수도를 배우면서 그는 태권도세계에 발을 디뎠다.키가 크고 미남형의 얼굴에 노력형으로 태권도 품세가 일품이었다. 그는 47년 육군통신학교에서 당수도를 가르친 것이 인연이 되어 군 생활을 시작했다. 최성남이 교장으로 있던 시절이었다. 최성남은 후일 준장으로 예편한후 미국으로 건너가 반정부활동을 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별 하나의 최성남, 별 둘의 최홍희, 별 셋의 최덕신이 모두 미국내 친북한인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3최장군'을 빗대어 '별들의전향'이라고 불렀다. 남태희는 통신학교에서 무도강의를 하면서 50년 6월18일 육군 사관학교에서 최초로 당수도 시범을 보였다. 당시 사관학교 교수부장이던 조암중령은 7월1일부터 당수도를 정식과목으로 채택했지만 1주일후에 터진 전쟁과 조중령의 월북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남태희가 육군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받아 전방에 배치되었을때 그가 맨먼저 한 일은 소대원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전쟁은 잔인했고 군인은 오직 승리를 위해 살아 있어야 했다. 남태희의 호신술 교육은 51년의 용문산전투에서 빛을 발했다. 중공군의 춘기공세로 아군은 후퇴를 거듭하다 용문산 중턱에 이르렀다.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6사단 소속의 1개 연대 병력이 중공군과 대치한 채 방어선 앞으로 나서게 됐다. 밀리고 밀리는 전투는 사흘을 계속했다. 그런 어느날 밤 육탄전이 벌어졌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쌍방이 총을 쏠 수 없었다. 당수도의 위력이 발휘된 것이다. 남태희는 그때 자신의 손으로도 중공군을 수없이 처치했다고 한다. 이 용문산전투는 사상 처음으로 사면이 적으로 둘러싸인 전투에서 승리한 작전으로 전사에 남아 있다. 이 작전을 승리로 이끈 장도영은 훗날 4성장군이 되었고, 5.16후 미국에 이주해 미시간 대학의 정치학교수로 있다. 전시에 탄생한 화랑무도관은 처음에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제주도에 있던 보병 제 29사단 최홍희 사단장과 화랑무도관의 남태희중위가 만나면서 태권도를 향한 출범은 순풍을 맞는다. 최홍희 사단장은 군대 내에 당수도를 본격적으로 보급시키자면서 남태희를 자기사단으로 전속시켰다. 사단장이 전면에 나설 수 없어 남중위가 훈련을 맡았다. 최홍희와 남태희는 54년 국군사상 처음으로 '오도관'이라는 군 무도관을 창설한다. 초대관장은 최홍희, 사범은 남태희였다. 오도관은 '도를 터득한다'는 뜻이었지만 5대 민간도장인 청도, 무덕, 승무, 지도, 창무를 능가한다는 의미로 썼다고 한다. 오도관에는 우종림, 고재천, 김석규, 백준기등이 있었으며 훗날 남태희와 함께 최홍희의 태권도 보급을 도왔던 한차교도 있었다. 5대 민간도장에 이어 오도관이 생김으로서 한국 무도계는 6대문파를 이루게 되었다.
협회로의 꿈
협회를 만드려는 노력은 해방 직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늘 결렬되고 말았는데 이는 서열문제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대부분의 관장이나 사범들이 한국전쟁 중 부산에 피난 가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자주 만났고 그래서 나온 것이 협회를 만들자는 논의였다. 창졸간에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쉽게 구성이 됐다. 대한공수도협회. 청도관의 현종명, 승무관의 노병직, 창무관의 이남석, 지도관의 윤쾌병과 이종우 등이 참여해 있었다. 회장은 노병직이, 이사장은 유도인으로 참여한 김인화, 사무총장은 이종우가 맡았다. 서울이 수복되자 공수도 협회도 돈과 세력을 겸비한 사람을 회장에 추대하는 등 새 임원을 구성하고 사무실도 새로 냈다. 조선전업사장인 이중재에 이어, 촉망받던 정치인 민관식이 회장에 추대됐다. 기업체의 장이나 정치인이 협회의 장을 맡기 시작한 것이다. 공수도협회는 각 도장마다 각각인 단을 통일하자는 목적으로 우선 관장들의 단을 최고 4단으로 올리는 일부터 했다. 대한공수도협회는 59년 오도관을 가입시키면서 이름을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꿨다. 태권도라는 말이 공식화되고 이때부터 당수도니 공수도니 하는 말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군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군 내부에 태권도가 대대적으로 보급되면서 민간도장과 오도관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간도장 출신이 입대해 태권도를 계속하려면 군의 단급심사를 새로 받아야 했다. 민간도장이 단급이 통일돼 있지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민간도장들도 군과 경찰에 태권도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도관이 생기면서 누가 가르치냐는 문제를 두고 군과 민간사이에 마찰이 빈번해졌다. 제2군사령부에서 발생한 오도관의 남태희 관장과 무덕관의 홍종수 관장이 나란히 태권도를 가르치며 경쟁을 벌인 것도 이때문이었다. 군 내부의 태권도 세력은 비태권도 세력과 자주 부딪혔다. 대북 첩보활동을 하는 첩보대(HID)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 부대와 태권도사단인 제29사단이 속초에서 맞부딪힌 사건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전쟁 직후였다. 어느날 29사단의 연대장 한 사람이 간성에 나와 술을 마시다 첩보부대원들과 시비가 붙었다. 간성옥이란 조그마한 술집이었는데 첩보대원들이 술 자리에 들이닥쳐 술상을 엎는 등 행패를 부린 것이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운전병이 가까운 헌병대에 연락하고 헌병대장이 대원들과 함께 출동했다. 헌병대장이 꾸짖기만 했는데도 첩보대원들은 그를 1주일이나 입원할 정도로 팼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연대장은 피신을 했지만 사건은 의외의 방향으로 커지고 말았다. 태권도를 익힌 사단의 대대장 하나가 파다하게 퍼진 첩보대원들의 행패소식에 크게 분노했다. 그는 29사단의 명예를 보복으로 되찾아야 한다면서 사단 내 태권도인들을 모았다. 태권도 군인들에게 첩보대원들은 적수가 아니었다. 행패를 부린 첩보대원들을 늘어지도록 패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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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2.06
  • 저작시기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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