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벽에 걸린 전화기와 메모판을 떼어내 던지려는 순간, 그녀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성난 표정이 풀어지며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전화번호들이 적힌 메모판을 들고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린다. 부드럽게 속삭이는 어조로, 그러나 때로는 설득하는 어조로 통화한다.)
유경화 여보세요, 유경화예요. 내 목소리 기억하시죠? 요즈음엔 자살 상담 방송이 중단 되어서 살기가 힘들 거예요. 그래서요? ……듣고 보니깐 더욱 문제가 악화되었군요. 남편은 부인을 의심만 하구……저런, 가엾어라! 그럼 부인은 남편이 때리는데도 맞고만 있었나요? 맙소사. 아무 반항도 안 한다고 더욱 더 때려요? 이젠 정말 어쩔 수가 없겠어요. 부인의 결백을 증명할 길은 자살밖엔 없겠다구요. 부인이 원하신다면, 간단히 죽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죠. 취사용 도시가스를 사용하세요. 가스의 벨브를 열어 놓고 가만히 누워서 심호흡을 하는 거예요. 이때 주의할 점은요, 가스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모든 구멍을 꼭꼭 막는 거예요. 하수도 구멍, 환기통 구멍, 창문의 빈 틈, 만약 구멍이나 빈 틈이 있으면 헝겊으로 틀어 막고 접착 테이프로 붙이세요. 아 참, 그리구요, 마지막으로 방송국에 전화하시죠.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다구요. 아, 네……네……하루 이틀 더 있다가 남편과 의논해 보시겠다니……그러세요. 그럼….
(유경화, 실망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다. 메모판의 다른 번호를 골라 다이얼을 돌린다.)
유경화 안녕하세요, 선생님? 방송을 중단했지만, 그동안 자주 상담했던 단골들에겐 특별히 전화를 해드리는 거예요. 어떠세요, 요즈음은?……아, 그렇군요. 나도 이해가 도요. 선생님처럼, 나 역시 행복과 불행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쓴 맛을 봤답니다. 더구나 나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는데 타인의 잘못으로 불행해지다니, 정말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옛날의 노예들, 자존심도 없고 감정도 없는 노예들은 이런 상태를 순응하고 살았겠죠. 하지만 선생님은 노예가 아니잖아요? 굴욕적인 불행을 참고 살기 보다는, 그 불행을 과감히 거부하는 자유인이되세요. ……네. 잘 결심하셨어요! 역시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선생님 답군요. 그러나 자살은 결심한 순간 실행해야 돼요! 지난 번 그랬잖아요. 나하고 상담하면서 차일피일 미뤄두니깐 마음이 변덕을 부렸었죠? 또 다시 그런 비겁한 자기배반에 빠지기 전에, 오늘은 먼저 목숨을 끊으세요! 선생님, 내가 자살의 좋은 방법을 가르쳐 드릴께요. 목욕탕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워 놓구요. 온몸을 그 물속에 담그면요, 마치 태어날 때의 어머니 자궁처럼 평안해진답니다. 그럼 그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죽을 때까지 연장시키면서, 면도칼로 손목의 동맥을 자르세요. 아, 한 가지 빠진 게 있군요. 목욕탕 속에 들어가기 전에 방송국으로 전화하세요. 자살 상담이 있었다면 죽지는 않았을 거라구요. 선생님, 꼭 그렇게 전화하고 죽으세요. 그……그런데요? 보일러가 고장나서……더운 물이 안 나와요? 언제 고치실 거죠? 뭐……내년 봄이나……고칠 거라구요?
(유경화, 전화를 끊는다. 그녀는 계속해 다른 전화번호를 골라 다이얼을 돌린다. 점점 자신감을 잃고, 초초하며, 애가 타는 모습이다.)
유경화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나, 유경화예요……오, 그래요! 내 전화를 기다리고 계셨다니 고마워요! 할머니, 오늘도 혼자서 개처럼 집을 지키시는군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너무 안됐어요. 윗어른으로서의 체신과 권위는 사라진 채, 그저 쓸모없는 늙은이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뭐라구요, 할머니? 오늘은 생각하는 게 죽음뿐이라구요?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사람은 죽고나서야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알게 되죠. 나 역시 지금 죽고 싶어요, 할머니. 우리 함께 죽어요. 동반 자살하자는 거죠. 죽는 방법은 간단해요. 비닐 봉지를 얼굴에 둘러 쓰고, 공기가 통하지 않게 고무줄로 묶는 거죠. 시장에서 배추와 무를 담아줬던 비닐 봉지가 있다구요? 됐어요, 바로 그거면 돼요. 잠깐만요, 할머니. 저도 부엌에 가서 비닐 봉지를 찾아 보겠어요. (전화기를 들고 부엌 쪽으로 걸어간다.) 아, 여기에 있어요! 할머니는 고무줄도 준비하셨다구요? 저는 포장용 끈으로 묶겠어요. 자, 그럼 우리 똑같이, 비닐 봉투를 머리에다 둘러써요! (자신의 머리에 비닐봉투를 씌운다.) 목까지 내리 덮으셨죠? 네, 잘하셨어요. 다음엔 목둘레를 고무줄로 단단히 묶어요! 공기가 통하지 않게, 숨을 쉴 수 없게, 꼭꼭 졸라매요! (포장용 끈으로 자신의 목을 감는다. 점점 고통스럽게 숨이 가빠지는 목소리로) 할머니, 방송국에 전화해서 할머니의 신음 소리를 들려줘요! 저도 방송국에 전화할께요, 그리고 마지막 한 호흡가지, 멍청이 놈들한테 들려 줄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 왜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죠? 가슴이 답답할 것 같아서……고무줄을 풀었다구요…….
(유경화, 목을 묶었던 끈을 풀고서 비닐 봉지를 벗어 내던진다. 그리고는 울음을 터뜨리며 장롱 속으로 들어간다. 사이, 유경화는 손을 뻗어서 장롱의 문을 닫는다. 중년 남자,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여 장롱 밖으로 흘러나오는 유경화의 울음 소리를 듣는다.)
중년 남자 나는 이 흐느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안도의 숨을 쉽니다. 이 흐느낌은 유경화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니까요. 그리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1993년 겨울 어느 날 들었던 울음소리와 지금의 울음소리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군요. 처음엔 아지타토(agitato), 격하게 시작해서 다음은 알레그로 모데라토(allefrt moderato), 즉 알맞게 빠른 속도가 되었다가, 차츰차츰 느리고 약해지는 칼란도(calando), 맨 나중은 여려지면서 사라지는 모렌도(morendo)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유경화는 울도록 놓아두고 나가십시오. 이미 이 연극을 봤던 관객으로서 말씀드리겠는데, 장롱 속의 저 울음이 끝나려면 멀었습니다. 이제 겨우 알레그로 모데라토거든요. 오늘 밤을 꼬박 새고,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저 울음소리는 멈출 겁니다. 그럼 여러분, 안녕히 가십시오!
(중년 남자, 관객석 통로를 지나 퇴장한다. 무대조명, 서서히 암전하면서 막이 내린다.)
-막
유경화 여보세요, 유경화예요. 내 목소리 기억하시죠? 요즈음엔 자살 상담 방송이 중단 되어서 살기가 힘들 거예요. 그래서요? ……듣고 보니깐 더욱 문제가 악화되었군요. 남편은 부인을 의심만 하구……저런, 가엾어라! 그럼 부인은 남편이 때리는데도 맞고만 있었나요? 맙소사. 아무 반항도 안 한다고 더욱 더 때려요? 이젠 정말 어쩔 수가 없겠어요. 부인의 결백을 증명할 길은 자살밖엔 없겠다구요. 부인이 원하신다면, 간단히 죽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죠. 취사용 도시가스를 사용하세요. 가스의 벨브를 열어 놓고 가만히 누워서 심호흡을 하는 거예요. 이때 주의할 점은요, 가스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모든 구멍을 꼭꼭 막는 거예요. 하수도 구멍, 환기통 구멍, 창문의 빈 틈, 만약 구멍이나 빈 틈이 있으면 헝겊으로 틀어 막고 접착 테이프로 붙이세요. 아 참, 그리구요, 마지막으로 방송국에 전화하시죠. 자살상담 프로그램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다구요. 아, 네……네……하루 이틀 더 있다가 남편과 의논해 보시겠다니……그러세요. 그럼….
(유경화, 실망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다. 메모판의 다른 번호를 골라 다이얼을 돌린다.)
유경화 안녕하세요, 선생님? 방송을 중단했지만, 그동안 자주 상담했던 단골들에겐 특별히 전화를 해드리는 거예요. 어떠세요, 요즈음은?……아, 그렇군요. 나도 이해가 도요. 선생님처럼, 나 역시 행복과 불행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쓴 맛을 봤답니다. 더구나 나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는데 타인의 잘못으로 불행해지다니, 정말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옛날의 노예들, 자존심도 없고 감정도 없는 노예들은 이런 상태를 순응하고 살았겠죠. 하지만 선생님은 노예가 아니잖아요? 굴욕적인 불행을 참고 살기 보다는, 그 불행을 과감히 거부하는 자유인이되세요. ……네. 잘 결심하셨어요! 역시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선생님 답군요. 그러나 자살은 결심한 순간 실행해야 돼요! 지난 번 그랬잖아요. 나하고 상담하면서 차일피일 미뤄두니깐 마음이 변덕을 부렸었죠? 또 다시 그런 비겁한 자기배반에 빠지기 전에, 오늘은 먼저 목숨을 끊으세요! 선생님, 내가 자살의 좋은 방법을 가르쳐 드릴께요. 목욕탕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워 놓구요. 온몸을 그 물속에 담그면요, 마치 태어날 때의 어머니 자궁처럼 평안해진답니다. 그럼 그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죽을 때까지 연장시키면서, 면도칼로 손목의 동맥을 자르세요. 아, 한 가지 빠진 게 있군요. 목욕탕 속에 들어가기 전에 방송국으로 전화하세요. 자살 상담이 있었다면 죽지는 않았을 거라구요. 선생님, 꼭 그렇게 전화하고 죽으세요. 그……그런데요? 보일러가 고장나서……더운 물이 안 나와요? 언제 고치실 거죠? 뭐……내년 봄이나……고칠 거라구요?
(유경화, 전화를 끊는다. 그녀는 계속해 다른 전화번호를 골라 다이얼을 돌린다. 점점 자신감을 잃고, 초초하며, 애가 타는 모습이다.)
유경화 할머니, 안녕하셨어요? 나, 유경화예요……오, 그래요! 내 전화를 기다리고 계셨다니 고마워요! 할머니, 오늘도 혼자서 개처럼 집을 지키시는군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너무 안됐어요. 윗어른으로서의 체신과 권위는 사라진 채, 그저 쓸모없는 늙은이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뭐라구요, 할머니? 오늘은 생각하는 게 죽음뿐이라구요?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사람은 죽고나서야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알게 되죠. 나 역시 지금 죽고 싶어요, 할머니. 우리 함께 죽어요. 동반 자살하자는 거죠. 죽는 방법은 간단해요. 비닐 봉지를 얼굴에 둘러 쓰고, 공기가 통하지 않게 고무줄로 묶는 거죠. 시장에서 배추와 무를 담아줬던 비닐 봉지가 있다구요? 됐어요, 바로 그거면 돼요. 잠깐만요, 할머니. 저도 부엌에 가서 비닐 봉지를 찾아 보겠어요. (전화기를 들고 부엌 쪽으로 걸어간다.) 아, 여기에 있어요! 할머니는 고무줄도 준비하셨다구요? 저는 포장용 끈으로 묶겠어요. 자, 그럼 우리 똑같이, 비닐 봉투를 머리에다 둘러써요! (자신의 머리에 비닐봉투를 씌운다.) 목까지 내리 덮으셨죠? 네, 잘하셨어요. 다음엔 목둘레를 고무줄로 단단히 묶어요! 공기가 통하지 않게, 숨을 쉴 수 없게, 꼭꼭 졸라매요! (포장용 끈으로 자신의 목을 감는다. 점점 고통스럽게 숨이 가빠지는 목소리로) 할머니, 방송국에 전화해서 할머니의 신음 소리를 들려줘요! 저도 방송국에 전화할께요, 그리고 마지막 한 호흡가지, 멍청이 놈들한테 들려 줄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 왜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죠? 가슴이 답답할 것 같아서……고무줄을 풀었다구요…….
(유경화, 목을 묶었던 끈을 풀고서 비닐 봉지를 벗어 내던진다. 그리고는 울음을 터뜨리며 장롱 속으로 들어간다. 사이, 유경화는 손을 뻗어서 장롱의 문을 닫는다. 중년 남자,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여 장롱 밖으로 흘러나오는 유경화의 울음 소리를 듣는다.)
중년 남자 나는 이 흐느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안도의 숨을 쉽니다. 이 흐느낌은 유경화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니까요. 그리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1993년 겨울 어느 날 들었던 울음소리와 지금의 울음소리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군요. 처음엔 아지타토(agitato), 격하게 시작해서 다음은 알레그로 모데라토(allefrt moderato), 즉 알맞게 빠른 속도가 되었다가, 차츰차츰 느리고 약해지는 칼란도(calando), 맨 나중은 여려지면서 사라지는 모렌도(morendo)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유경화는 울도록 놓아두고 나가십시오. 이미 이 연극을 봤던 관객으로서 말씀드리겠는데, 장롱 속의 저 울음이 끝나려면 멀었습니다. 이제 겨우 알레그로 모데라토거든요. 오늘 밤을 꼬박 새고,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저 울음소리는 멈출 겁니다. 그럼 여러분, 안녕히 가십시오!
(중년 남자, 관객석 통로를 지나 퇴장한다. 무대조명, 서서히 암전하면서 막이 내린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