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Erwin Schrodinger의 연대기
2. Erwin Schrodinger의 과학적 업적
3. Erwin Schrodinger의 인생
4. 참고 문헌
2. Erwin Schrodinger의 과학적 업적
3. Erwin Schrodinger의 인생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한한 황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그녀를 욕하면서 그런 어리석은 여자에게서 벗어난 것이 다행스럽다고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지금도 그 난데없는 치욕을 얼마나 깊이 되새기고 있는가? 나는 어리석었다. 나만이 어리석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었던 고삐를,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고삐를 그녀에게 주었다. 내게는 여신 같았던 그녀에게, 하지만 어린애에게 주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그녀를 이끌 수도 있었다.
그녀를 이끈다고? 내가? 난 아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난 아직도 내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엘라
이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여인의 이름이 엘라 콜베라는 것 그리고 슈뢰딩거가 1908년에 짧았지만 강렬했던 연애를 했다는 것이 알려진 바의 전부이다.
· 펠리시
슈뢰딩거는 학자로서의 첫발을 내딛던 그 순간, 한 여인 때문에 학자로서의 생애를 포기할 생각을 하게 된다. 펠리시는 슈뢰딩거보다 만 여덟 살 정도 어렸다. 어린 시절에 슈뢰딩거는 가족끼리 모일 때마다 어린 펠리시를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그 이후에 펠리시는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했고, 그때부터 펠리시와 될 수 있는 한 오래 있고 싶어했다. 슈뢰딩거는 항상 막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소녀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펠리시의 어머니는 둘의 교제를 꺼려했고, 이런 식의 격리는 둘의 애정을 심화시켜, 둘은 곧 깊은 사랑에 빠졌다. 물리학자로서 슈뢰딩거의 미래는 비참했기 때문에 대학을 그만두고 가업인 리놀륨 사업에 뛰어들려 했지만, 아버지는 이것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펠리시의 어머니는 슈뢰딩거의 사회적 지위와 신교도이기보다는 자유사상가라는 점이 둘 사이의 결혼을 반대하게 만들었다. 결국 슈뢰딩거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 정신적, 낭만적, 성적 열정을 바치는 것을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에 슈뢰딩거는 결혼 제도를 경멸하면서, 결혼이라는 완고한 틀 밖에서 자신의 감성적인 삶을 누리려 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슈뢰딩거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더 높은 사회계층에 속한 여자들과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슈뢰딩거는 자신이 펠리시와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사회적인 것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 베르텔
어느 휴일 콜라우슈 가족이 슈뢰딩거를 찾아와 함께 소풍을 즐겼다. 콜라우슈 가족은 슈뢰딩거에게 예쁘고 명랑한 십대 소녀 안네마리 베르텔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잘츠부르크 출신으로 아이를 보는 일을 돕고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궁중 사진사로서, 잘츠부츠크에서 꽤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처음 만난 물리학자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가 <매우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슈뢰딩거와 안니의 첫 만남은 깊은 연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슈뢰딩거는 아직도 펠리시와의 진실한 사랑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슈뢰딩거는 전쟁을 포기한 상태로 받아들이고, 1915년의 게으르고 침체된 나날에서 회복하고 있을 무렵, 그는 분명히 안네마리 베르텔의 방문에 의해 힘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슈뢰딩거의 비엔나 애인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는데, 오직 잘츠부르크 출신의 시골 소녀만이 슈뢰딩거를 찾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베르텔은 이미 20세의 처녀가 되어 있었다. 안니의 말에 따르면, 슈뢰딩거와 안니는 이 때에도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혼 이전 슈뢰딩거의 성 경험은 오직 한 번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기록하지 않은 우연적인 만남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안니와 슈뢰딩거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약혼했다. 안니는 비엔나로 와서 보험회사 대표이사인 프리츠 바우어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안니의 월급이 슈뢰딩거의 연봉보다 많았고, 이것은 슈뢰딩거로 하여금 자기를 부끄럽고 참담하게 만들었다. 슈뢰딩거는 저녁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슈뢰딩거와 안네마리 베르텔은 두 번 결혼식을 올렸다. 첫번째 결혼식은 안니가 살던 교구에 있는 성 레오폴트 교회 사제관에서 치러졌고, 두번째 결혼식은 4월6일 마르틴스가세에 있는 신교 교회에서 보다 격식을 갖춰 치러졌다. 두 번의 결혼식은 그들이 결혼 생활이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최후까지 유지될 것을 암시하는 좋은 징조였는지 모른다.
슈뢰딩거가 결혼 후에도 잦은 연애를 했음을 고려해 볼 때, 그가 펠리시에게 버림받은 때부터 안니와 약혼할 때까지 어떤 중요한 사랑의 기록도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은 눈여겨 볼 만한 일이다. 그 8년의 기간동안 그는 분명 <달콤한 비엔나 소녀들>이나 그런 류의 여자들과 가끔 성관계를 가졌을 것이며, 전쟁 기간 중에는 직업적인 여성 이외의 여성과도 쉽게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 후 슈뢰딩거에게는 가정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분명 대단히 컸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안니는 최고의 아내였다. 그녀는 슈뢰딩거의 사소한 일들을 맡아 주었고, 슈뢰딩거가 그녀를 더 이상 성교 상대자로 보지 않게 되자, 그의 좋은 친구로 남아 심지어 그가 새로운 여자와 사귀는 것을 돕기까지 했다. 슈뢰딩거의 관점으로는 안니와의 결혼이 이상적이지는 않았겠지만, 그 결혼 덕분에 그가 많은 이득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혼 생활은 안니에게 결국 좌절감을 안겨 주었고, 위대한 사람의 아내라는 만족감만이 그녀를 조금 위로할 수 있을 뿐이었다. 중립적인 관찰자라면 이들이 어떤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기이한 결혼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결혼 생활을 둘러싼 수수께끼는 그들의 심리적 성적 생활사를 보다 깊이 이해해야만 풀릴 수 있다.
4. 참고 문헌
① http://helix.nature.com/nsu/990527/990527-4.html
② Fritjof Cafpra / The web of life
③ Walter Moore (전대호 옮김) / 슈뢰딩거의 삶 / 사이언스 북스
④ http://www.kps.or.kr/%7Epht/9-7_8/000745.htm
⑤ 임경순 /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그녀를 욕하면서 그런 어리석은 여자에게서 벗어난 것이 다행스럽다고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지금도 그 난데없는 치욕을 얼마나 깊이 되새기고 있는가? 나는 어리석었다. 나만이 어리석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었던 고삐를,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고삐를 그녀에게 주었다. 내게는 여신 같았던 그녀에게, 하지만 어린애에게 주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그녀를 이끌 수도 있었다.
그녀를 이끈다고? 내가? 난 아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난 아직도 내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엘라
이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여인의 이름이 엘라 콜베라는 것 그리고 슈뢰딩거가 1908년에 짧았지만 강렬했던 연애를 했다는 것이 알려진 바의 전부이다.
· 펠리시
슈뢰딩거는 학자로서의 첫발을 내딛던 그 순간, 한 여인 때문에 학자로서의 생애를 포기할 생각을 하게 된다. 펠리시는 슈뢰딩거보다 만 여덟 살 정도 어렸다. 어린 시절에 슈뢰딩거는 가족끼리 모일 때마다 어린 펠리시를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그 이후에 펠리시는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했고, 그때부터 펠리시와 될 수 있는 한 오래 있고 싶어했다. 슈뢰딩거는 항상 막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소녀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펠리시의 어머니는 둘의 교제를 꺼려했고, 이런 식의 격리는 둘의 애정을 심화시켜, 둘은 곧 깊은 사랑에 빠졌다. 물리학자로서 슈뢰딩거의 미래는 비참했기 때문에 대학을 그만두고 가업인 리놀륨 사업에 뛰어들려 했지만, 아버지는 이것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펠리시의 어머니는 슈뢰딩거의 사회적 지위와 신교도이기보다는 자유사상가라는 점이 둘 사이의 결혼을 반대하게 만들었다. 결국 슈뢰딩거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 정신적, 낭만적, 성적 열정을 바치는 것을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에 슈뢰딩거는 결혼 제도를 경멸하면서, 결혼이라는 완고한 틀 밖에서 자신의 감성적인 삶을 누리려 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슈뢰딩거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더 높은 사회계층에 속한 여자들과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슈뢰딩거는 자신이 펠리시와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사회적인 것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 베르텔
어느 휴일 콜라우슈 가족이 슈뢰딩거를 찾아와 함께 소풍을 즐겼다. 콜라우슈 가족은 슈뢰딩거에게 예쁘고 명랑한 십대 소녀 안네마리 베르텔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잘츠부르크 출신으로 아이를 보는 일을 돕고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궁중 사진사로서, 잘츠부츠크에서 꽤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처음 만난 물리학자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가 <매우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슈뢰딩거와 안니의 첫 만남은 깊은 연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슈뢰딩거는 아직도 펠리시와의 진실한 사랑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슈뢰딩거는 전쟁을 포기한 상태로 받아들이고, 1915년의 게으르고 침체된 나날에서 회복하고 있을 무렵, 그는 분명히 안네마리 베르텔의 방문에 의해 힘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슈뢰딩거의 비엔나 애인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는데, 오직 잘츠부르크 출신의 시골 소녀만이 슈뢰딩거를 찾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베르텔은 이미 20세의 처녀가 되어 있었다. 안니의 말에 따르면, 슈뢰딩거와 안니는 이 때에도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혼 이전 슈뢰딩거의 성 경험은 오직 한 번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기록하지 않은 우연적인 만남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안니와 슈뢰딩거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약혼했다. 안니는 비엔나로 와서 보험회사 대표이사인 프리츠 바우어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안니의 월급이 슈뢰딩거의 연봉보다 많았고, 이것은 슈뢰딩거로 하여금 자기를 부끄럽고 참담하게 만들었다. 슈뢰딩거는 저녁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슈뢰딩거와 안네마리 베르텔은 두 번 결혼식을 올렸다. 첫번째 결혼식은 안니가 살던 교구에 있는 성 레오폴트 교회 사제관에서 치러졌고, 두번째 결혼식은 4월6일 마르틴스가세에 있는 신교 교회에서 보다 격식을 갖춰 치러졌다. 두 번의 결혼식은 그들이 결혼 생활이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최후까지 유지될 것을 암시하는 좋은 징조였는지 모른다.
슈뢰딩거가 결혼 후에도 잦은 연애를 했음을 고려해 볼 때, 그가 펠리시에게 버림받은 때부터 안니와 약혼할 때까지 어떤 중요한 사랑의 기록도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은 눈여겨 볼 만한 일이다. 그 8년의 기간동안 그는 분명 <달콤한 비엔나 소녀들>이나 그런 류의 여자들과 가끔 성관계를 가졌을 것이며, 전쟁 기간 중에는 직업적인 여성 이외의 여성과도 쉽게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 후 슈뢰딩거에게는 가정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분명 대단히 컸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안니는 최고의 아내였다. 그녀는 슈뢰딩거의 사소한 일들을 맡아 주었고, 슈뢰딩거가 그녀를 더 이상 성교 상대자로 보지 않게 되자, 그의 좋은 친구로 남아 심지어 그가 새로운 여자와 사귀는 것을 돕기까지 했다. 슈뢰딩거의 관점으로는 안니와의 결혼이 이상적이지는 않았겠지만, 그 결혼 덕분에 그가 많은 이득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혼 생활은 안니에게 결국 좌절감을 안겨 주었고, 위대한 사람의 아내라는 만족감만이 그녀를 조금 위로할 수 있을 뿐이었다. 중립적인 관찰자라면 이들이 어떤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기이한 결혼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결혼 생활을 둘러싼 수수께끼는 그들의 심리적 성적 생활사를 보다 깊이 이해해야만 풀릴 수 있다.
4. 참고 문헌
① http://helix.nature.com/nsu/990527/990527-4.html
② Fritjof Cafpra / The web of life
③ Walter Moore (전대호 옮김) / 슈뢰딩거의 삶 / 사이언스 북스
④ http://www.kps.or.kr/%7Epht/9-7_8/000745.htm
⑤ 임경순 /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