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민주주의 성지로서의 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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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최근의 마산

Ⅰ. 민주주의 성지로서의 마산
1. 자유당정권의 독재와 4월혁명의 태동
2. 3·15 부정선거와 마산항쟁
1) 不正投票의 지령과 抗爭의 개시
2) 3·15 馬山抗爭의 발단
3) 시민의 호응과 시위확산
4) 조작된 불온삐라 사건
5) 항쟁의 사태수습 과정
3. 3·15 마산항쟁 2차 의거
1) 간곳 없는 희생자의 시체
2) 격노한 시민들의 궐기
4. 4월 혁명으로의 발전
5. 유신체제에의 항거 부마항쟁
1) 부마항쟁의 발단
2) 馬山市民의 투쟁과 維新體制의 종말
Ⅱ. 공업도시의 건설과 동마산의 탄생
Ⅲ. 번영하는 오늘의 마산

본문내용

을 갖게 되었다
Ⅱ. 공업도시의 건설과 동마산의 탄생
1960년대 후반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마산지역은 엄청난 사회적 변화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 변화는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경험과는 질적으로 다른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소상공업 도시를 포함한 농촌경제 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 지역사회가 변화해 갔다는 점이다. 종래 酒都馬山 그리고 수산물집산지로서의 상업도시 마산은 1965년 반네들(현 양덕동) 일대에 국내 최대규모의 현대식 합성섬유제조업체인 韓一合成纖維工業(株)가 건설된 것을 시발로 하여 공업도시화의 신호가 올려졌으며, 이후 마산의 지도와 지형이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바다가 육지로 변하고 농토가 공장부지나 택지로 변모해 갔다.
공업화의 가장 큰 계기는 정부의 강력한 공업화정책에 따라 마산과 창원지역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건설되면서부터였다. 1970년 1월 제정 · 공포된 輸出自由地域設置法에 따라 봉암동 地先公有水面 매립으로 조성된 대지위에 국내 최초의 臨海工團인 수출자유지역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수출자유지역은 외국자본을 직접 유치하여 수출을 증대시키고 유휴노동력의 고용증대를 늘이는 한편, 선진외국기술을 도입하여 이를 우리 것으로 흡수 발전시키는데에 그 목적을 둔 것이었다. 수출자유지역의 입주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인근 촌락의 유휴노동력이 속속 마산으로 모여 들었다. 이로써 마산은 남해안의 상공업 중심도시로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합성동 일대 1977년 12월 16일 전시민의 숙원이던 마산역이 건설되고 연이어 시외버스터미널이 시내 서성동에서 이곳으로 이전되어 마산의 교통중심지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혼잡한 교통소통을 위해 8차선의 중앙간선도로가 개통되었다. 이 도로의 양면에는 새로운 고층건물과 양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몇 해 사이에 하나의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종전의 구마산 · 신마산 · 북마산 이외에 새로이 동마산이 탄생한 것이다.
이와 함께 1973년 11월 14일 南海高速道路가 개통되고, 1977년 12월 12일 邱馬高速道路가 개통됨으로써 마산의 발전은 더욱더 가속화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마련되었던 대마산건설의 청사진이 1970년대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동마산의 탄생과 함께 인근 창원의 산업기지화는 마산의 확대와 인구증가를 더욱 촉진시켰다. 1961년 15만명에 지나지 않던 마산인구는 1971년까지 10년 사이에 4만5천명이 증가한 19만5천명으로 늘어났으며, 1976년에는 무려 33만8천여 명으로 불과 5년 사이에 2배 가까운 증가를 보였고 1980년대 말에는 45만명에 이르렀다.
마산시의 발전은 인근 창원시의 발전과 짝하여 더욱 확대되었다. 창원시는 1973년부터 당시의 창원군 창원면 ·상남면 ·웅남면 일대의 넓은 분지에 거대한 규모의 昌原機械工業團地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정권의 중화학공업정책에 따라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된 창원기계공업단지에는 산업기계 · 정밀기계 · 전기기계 · 수송기계 · 일반철물 등 기계업종 중심의 1백여 개 이상의 기업이 들어섰고 수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결집되었다. 대규모 공단의 배후 도시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설계에 의해 조성된 창원시의 발전은 우리 마산시를 더욱 발전 확대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마산시는 1995년 1월 1일부로 이전 창원군의 內西面· 龜山面· 鎭東面·鎭田面·鎭北面의 5개 면을 흡수 통합함에 따라 지역적 확대와 더불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Ⅲ. 번영하는 오늘의 마산
우리의 향토 마산은 이제 서기 2000년대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도시기반조성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미 1982년 10월 우리 고장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全國體育大會가 개최되었다. 이를 계기로 종합운동장 · 야구장 등 각종 체육시설이 완비되었고, 중앙간선도로 개설의 가장 큰 난제로 남아 있던 구간인 석전삼거리에서 창동중심지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도 완전히 개통되었다. 아울러 해안도로의 건설 등 시가지 정비사업도 순조로이 마무리 되어 마산의 도시면모를 일신시켰다. 나날이 늘어나는 교통량의 원활한 해소를 위해 무학산록을 가로지르는 산복도로개설사업도 완료되었다.
그리고 인근 창원시로 1983년 7월 1일 경상남도청이 이전함에 따라 각급 도단위의 관서와 유관기관들이 속속 옮겨와 경남의 행정중심지를 형성함으로써 마산은 창원시와의 연계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발전을 추진하게 되었다. 국제무역항과 임해공업도시로서의역할 이외에 경남의 유통산업중심지로의 발전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급속한 공업화와 인구증가에 뒤따르지 못해 시민생활에 큰 불편을 주어 왔던 상수도 기근을 해소하기 위한 작업도 마무리 되었다. 1일 생산용량 20만톤 규모의 광역권 상수도사업이 총사업비 내외자 394억원을 투입하여 만 2개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84년 12월 준공되었다.
또한 급속한 공업도시화와 인구급증 과정에서 나타난 부산물인 항만공해로 오염된 마산 앞바다를 뒤늦게나마 되살리기 위한 첫단계사업으로 총 750억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마산권 下水終末處理場 시설공사가 착수되었다.
마산항의 부두기능을 높이는 동시에 불량 임항지역을 정비하고 부족한 대지조성을 위한 공유수면매립사업이 남성동에서 중앙부두에 이르는 해안 선착장과 서항일대에서 착수되었다.
교육문화분야의 발전도 괄목할 정도로 진행되었다. 1981년 경남대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에 이어 각급학교가 증설됨으로써 교육기관도 크게 확충되었다. 외형적인 도시발전에만 치중한 나머지 오랫동안 등한시되어 왔던 문화 예술사업도 1984년의 馬山市立交響樂團의 창립과 갖가지 문화행사의 추진으로 차차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밖에 도서관 건립을 비롯한 여러 문화시설의 건립도 추진되고 있다. 45만 마산시민의 쾌적한 생활환경조성을 위한 시민공단도 머지 않아 마련될 것이다.
우리 향토 마산시민은 역사가 입증하듯이 진취적이고 강인한 기질과 부정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움과 뛰어난 창의성을 지녔다. 아울러 풍요롭고 행복한 2000년대의 대마산 건설을 위해 모두가 합심하여 쉬지 않고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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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2.26
  • 저작시기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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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16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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