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여추우 수필 : 최근 중국수필의 추세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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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비판, 애착, 혼란
3. 지식, 상상, 분석, 고색창연
4. 余秋雨 붐
5. 수필의 범주 구분, 상상과 비허구성, 상업성과 엄숙성
6. 맺음말
* 〈도사탑〉(余秋雨)

본문내용

. 모두 잘 싣고 단단히 묶은 다음, 휘익--!, 수레 대열이 출발했다.
성정부로 가는 게 아니었다. 일찍이 나으리들이 말한 바처럼 운송비가 없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런던으로 가는 거다. 파리로 가는 거다. 뻬쩨르부르크로 도꾜로 가는 거다.
왕도사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허리숙여 절을 하면서 먼 데로 배웅까지 나갔다. 그는 공손하게 스타인을 '스나으리 타인님', 펠리오를 '펠나으리 리오님'이라 불렀다. 그의 주머니에 생긴 묵직한 은전은 평상시 시주 때는 만지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스나으리, 펠나으리의 '보시'에 감사했다. 수레 대열이 이미 멀어져갔는데도 그는 여전히 길어귀에 서 있었다. 사막에는 두 줄기 깊이 패인 수레 자국만 남아있었다.
스타인네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학술보고와 탐험보고는 언제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종종 이상한 왕도사가 등장했고, 외국의 청중들로 하여금 이렇게 멍청한 인물의 손에서 이와 같은 유산을 구해낸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던가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암시했다. 그들이 산넘고 물건너 먼길을 간 것은 뚠후앙의 문헌을 암흑 속에서 햇빛 속으로 구해내는 일이었다고.
그들은 모두가 실천적 정신이 넘치는 학자들이었다. 학술적인 면에서 나는 그들에게 탄복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글에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이 빠져있다. 나서서 반박하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고, 내 마음 속에는 오늘날 한 젊은 시인이 쓴 싯귀 몇 구절이 떠오를 따름이다. 그건 시인이 위앤밍원[圓明園]을 불태운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에게 쓴 것이다.
나는 너무나 한스럽다.
내가 한 세기 먼저 태어나지 못한 것이.
으스스한 옛성에서
별빛 어스름한 광야에서
내 당신과 마주 보고 서서
내가 당신이 내던진 흰장갑을 집어들거나
당신이 내가 내뿌린 칼을 받아들거나
나와 당신이 서로 전마를 타거나
저 멀리 하늘을 뒤덮은 깃발들을 물리치고
구름떼같은 병사들을 물리치고
성아래서 생사를 겨루지 못한 것이.
이들 학자들에게 이 싯귀는 어쩌면 너무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진짜 이런 방법으로라도 그들의 수레 대열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사막에서 마주 보고 서서. 그들이 당신네들은 연구할 능력이 없잖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좋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학문의 우열을 겨루어 보자. 뭐든 좋다.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을 이렇게 몰래 가져가는 것만은 안된다.
나는 다시 탄식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수레 대열이 정말 나 때문에 멈춘다면, 그 다음에는 또 어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그 당시의 서울로 가져가야 될 것이다. 운송비는 잠시 논하지 말자. 하지만 당시 동굴의 문헌 중 상당량은 분명 서울로 가지 않았던가? 그 모습이라는 것이 나무 상자에 담지도 않고 그저 거적자리로 대충 꾸린 것이었고, 연도의 벼슬아치들은 손을 쑤셔넣어 잡히는 대로 빼갔고, 걸음을 멈추는 곳마다 몇 꾸러미씩 그냥 머물러야 했고, 결국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여기저기 다 흩어져버리고 꼴이 아니었고.
위대한 중국이이라면서 경전 몇 권조차도 보존하지 못하다니! 심지어 어떨 때 나는 독한 마음으로 내뱉고 싶다. 벼슬아치들에게 무수히 짓밟히는 모습에 비하자면 차라리 런던 박물관에 수장하는 게 낫겠다고. 하지만 필경 이 말도 그리 후련치는 않다. 대체 내가 막아선 수레 대열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곳도 안되고, 저곳도 안되고. 나는 그저 사막 한가운데 멈춰세워 놓고는 한바탕 통곡할 밖에 없다.
아, 나는 너무나 한스럽다!
4.
나만 한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뚠후앙연구원의 전문가들은 나보다도 훨씬 더 한스러워한다. 그들은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직 굳은 얼굴로 수십 년을 파고들면서 뚠후앙의 문헌을 연구하고 있다. 문헌의 마이크로필름은 외국에서 사오면 되고, 치욕을 느낄수록 더욱더 연구에 전념한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뭐까오굴에서 뚠후앙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수 일 간의 회의가 끝난 뒤 일본학자 한 사람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과거의 관점을 수정하고 싶습니다. 이 수 년 간의 성과가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뚠후앙도 중국에 있고 뚠후앙학도 중국에 있다는 것을!"
중국의 전문가들은 그다지 격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묵묵히 회의장을 나와 왕도사의 부도 앞으로 다가갔다.
余秋雨, 〈道士塔〉, 《文化苦旅》, (上海 : 知識出版社, 1992), PP.1-7. (2000년 3월 19일 김혜준 옮김)
뚠후앙석굴[敦煌石窟]
중국 깐수성[甘肅省] 뚠후앙현[敦煌縣] 남동쪽 20 km 지점에 있는 불교유적. 소조불상과 벽화 등의 불교미술품 외에 많은 고문서류가 발견되어 동서문화교류사 또는 중국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907년 영국의 A.스타인과 그 다음해 프랑스의 P.펠리오에 의해 알려졌다. 밍사산[鳴沙山] 기슭에 길이 1.6 km에 달하는 크고 작은 600여 개의 불교석굴이 있는데, 뚠후앙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의 조사에 의하면 불상조각이나 벽화가 있는 동굴은 469개소에 달한다. 빙하기의 충적층에 속하는 수성암으로 된 석굴이어서 불상은 모두 소조상이며 4세기 중반부터 13세기에 이르는 1,000년 간 석굴을 만든 사람들은 벽화의 제작에 힘썼다. 이들 벽화는 표면에 석회를 칠한 벽면 위에 짙은 채색의 불교회화를 치밀하게 묘사했는데, 제작 연대별로는 위나라 때가 22굴, 수나라 때가 90굴, 송나라 때가 103굴이 있다. 그 중에는 청나라 때에 들어와서 그린 것들도 있다. 뚠후앙석굴의 조사보존사업은 1960∼70년대에 걸쳐 행해졌는데 1972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것인 AD 366년의 것으로부터 492개의 동굴이 조사되어 2,000여 채의 채색소조상과 4만㎡의 벽화를 조사 연구하고 500여㎡의 벽화와 30여 채의 소조상이 복구되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북위와 당의 견직물 60여 점, 748년의 문서, 인쇄된 불상 등을 발견 조사하고 계속 연구하고 있다. 뚠후앙문서 중의 불교관계서적을 통해 중국의 불교 수용과정을 엿볼 수 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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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1.02
  • 저작시기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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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17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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