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술어 및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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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실학의 술어 및 개념

◈ 실학의 개념

◈ 실학사상의 발생과 전개
1. 지봉 이수광 (1565∼1927 )
2. 반계 유형원 (1622∼1673 )

◈ 실학의 발전
1. 성호 이익 (1682∼1764)
2. 연암 박지원 (1737 -1805)
3. 초정 박제가 (1750 - 1805)
4. 다산 정약용 (1762 ∼ 1836)

◈ 결론

본문내용

민주사상이라 할 것이다. 다산은 동시에 법도 역시 백성의 의사를 반영하여 제정된 것이며 따라서 법은 백성에 유리한 것이 었음을 밝히었다. 이와같이 그는 민본적 민주사상의 역사적 논거를 밝힌 기초위에서 당시의 봉건전제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산은 당시의 봉건통치제도가 민본사상과는 정반대로 반민주적 제도임을 밝히고 동시에 봉건관료배들이 어떻게하면 백성들로부터 더 많이 착취하고 수탈 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머리를 쓰고 폭력에 의거하여 가렴잡세를 하는데에 증오 하였다. 다산은 민본사상에 어긋나는 봉건 전제정치의 반동적 본질을 폭로하고 나아가 반민주적 제도를 개혁 할 것을 주장하고 봉건관료배들의 횡포를 보고 도둑놈이라 했는데, 토호와 관리는 작은 도둑이나 감사는 큰 도둑이라 하여 민본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는 토지제도를 개혁해야하고 여전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는 봉건신분제도를 없애고 양반 특권층을 제거하여 백성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3 여전론
실학파의 전제개혁사상은 다산에 의하여 집대성되고 가장 고조된 농민의 지향을 반영한 것이다. 그의 전론은 두 단계를 거쳐 발전하고 있다. 처음에는 정전제를 우리 실정에 맞게 실현해 보자는 것이요, 다음에는 정전제를 발전시켜 여전법의 실시를 주장한 것이다. 다산은 토지문제에 대해서 민본론의 원칙에 기초하여 사유를 폐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정전제의 원칙을 재현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시도로서 그는 전국의 토지면적의 구분의일을 국가가 매수하여 공전을 설정하고 각각 백무로 구분된 공전을 둘러싸고 있는 백무씩의 사전경작자 8세대를 단위로하여 정전을 구성 할 것을 주장하였다. 매 공전은 8세대의 사유경작자 농민들이 공동경작하여 그것으로 국가조세를 납입하고 매 사전에서 생산되는 수확은 전부 각기 사유경작자들의 소유로 되며 아무도 그것을 침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실시하자는 정전제는 이러한 것이다. 여기에는 사전에 있어서도 놀고 먹는 토지소유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소작제도도 완전히 배제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의 <전론>에서는 정전론을 재검토하고 그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여전법」을 창안 하였다. 그의 정전론에서는 독점적 토지소유와 토지겸병과 소작관계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으나 사유경작의 사적토지소유를 그냥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그 사전에서 토지겸병이 발생 할 가능성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전론의 맹점은 다산의 일관하는 토지사유의 부정과 균배사상과는 어긋난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가 제시한 정전론의 불합리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토지의 개인소유와 그 자체의 변혁에 중심을 돌리면서 새로운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이 여전법이다. 이 여전법의 주요한 특징은 토지의 사유제를 없애고 토지의 공유와 공동경작에 기초한 농촌 공동경영형태라는데 있다. 이와같은 토지의 공유, 공동경작, 공동수확, 일역에 의한 곡물분배등은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산의 여전법은 봉건적 토지소유를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토지의 공동소유 , 공동경작제를 창안함으로써 토지소유는 그 경제적 내용에 있어서 사회적인 것으로 되게 되었다. 특히 여전법에서 농민들이 일역부에 의하여 곡물을 지급받는 형식은 우리의 경제사상사에 있어서 뚜렷한 창견의 하나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근거에는 민본주의와 평등사상이 깔려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형편으로 볼 때 탁월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문화 주체론
실학의 대성자인 다산은 문학이 자기의 사명을 구행하기 위하여 문학의 주체인 백성들의 생활적 욕구를 반영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작품이 아무리 잘 구상된 것이라 해도 생활로부터 유리된 것으로써 백성들의 환영은 고사하고 배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걸핏하면 중국의 사실들을 사용하는 비루한 사대주의적 품성을 비판하고 우리나라의 사실과 우리나라의 문헌들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주적인 문화발전과 백성들의 사회적요구에 순응하여 사대, 모방, 형식주의를 일체 배격하였다. 이것은 글짓는데서 뿐만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자주자립의 원칙을 관철한 것이며 자기 것을 허무로 돌리고 외세에 의존하고 외래의 문화를 숭상모방만 한다면 어찌 자주문화를 발전케 하겠으며 우리 문화의 전통을 연구하고 그에 의하여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지 결코 배타가 아니라 주체적인 입장에서 민족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모화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중국에 대한 옳은 태도를 가지도록 강조하였다. 소위 중국이란 중은 어디를 기준으로 중이라하며 동국이라는 동은 어디를 기준으로 동이라 하는지 모를 일이다 하고 해가 머리위에 떳을 때 오시라고 부르는데 이 오시부터 시간과 해지는 시간과의 사이가 동일하다면 곧 내가 서있는 여기가 동서의 중으로 되며 자기 위치가 지구위도상의 중간에 서고 있다면 남북의 중간으로 된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이와같이 동서남북의 중간이라면 어느 곳을 물론하고 중국이라 해서 안 될 것이 없고 동국이라는 것이 또 어디에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하여 모화사상의 부당성을 비판 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문화주체론은 인간본성에서 이를 구하였으며, 다산은 인간평등의 원리를 주장하고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과 경험에 의한 차이라고 하였다. 인성이 선천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학습과 경험에 의한다고 생각하여 종래의 봉건제도를 합리화하던 신분제의 이론적 근거를 부정하고 민주적인 인간평등론을 내세운 것이다.
◈ 결론
실학파는 유반계를 비조로 하고 이성호를 거쳐 정다산에 이르러 집대성 되었다. 특히 이 학파를 통하여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가 수용되어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근대화를 촉진하는 힘이 길러졌다는 사실을 말하여 둔다. 그러나 이들은 정권 담당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비판자였기에 국가진운에 강력한 힘이 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R e p o r t **************
朝 鮮 의 實 學 思 想
과 목 : 한 국 유 학
지 도 교 수 : 송 재 국 교수님
학 과 : 한 문 교 육 과
학 번 : 91511004
성 명 : 성 백 인
  • 가격5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3.01.23
  • 저작시기2003.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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