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申師任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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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신사임당 (申師任堂)

2. 황진이 (黃眞伊)

3. 육영수 (陸英修)

본문내용

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였다.
여사는 세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만은 영부인이란 칭호를 절대로 쓰지 못하도록 했다. 선생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관심이 다른 부모 못지 않은, 모범적인 학부형이었다.
바쁜 시간을 틈내 자녀들의 학교를 곧잘 찾는 육여사는 언제나 정문 밖에서부터 혼자 걸어 학교로 들어가곤 했다.
지만군이 청운 국민학교 6학년 때 초겨울이었다. 육여사는 느닷없이 학교를 방문하여 지만군이 수업을 받는 3층 교실을 찾아가 추운 복도에서 무려 30분 동안을 혼자서 기다리기도 했다. 담임선생은 지만군이 숙제를 해 오지 않은 날 손바닥을 때렸다. 이를 안 육여사는 저녁에 담임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 잘하셨습니다. 숙제를 안해 올 때는 사정없이 꾸짖어 주십시오. 어머니로서 미처 살피지 못해 미안합니다」하고 정중하게 부탁과 사과를 했다.
또한 학교에 가는 날이면 방과후 학교의 교실을 둘러보고 창문의 커튼을 거두어 손수 빨기도 했다
. 육여사는 비록 학교에 자주 찾아가지 못하더라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학교 생활과 학업 성적을 자세히 묻는 자상한 학부모였다.
육여사는 자녀들이 마음껏 뛰어 놀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다. 여사는「어른들 틈에서 지내는 생활을 하다보니 친구가 없을 것이 걱정이 된다」고 담임선생들에게 이따금씩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육여사는 박대통령이 청와대를 비운 사이를 이용하여 자녀들의 친구를 초대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지만군이 졸업반일 때 같은 학년 친구 전원(1천1백명)을 불러 함께 잔디밭에서 뛰어 놀았다. 이때 육여사가 입고 나온 남색 치맛자락은 개구쟁이들의 손때가 묻어 까맣게 변했지만 아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다.
육여사는 인자하면서도 엄한 어머니였다. 특히 자녀들이 특권 의식을 가지지 않을까 항상 염려했다. 여사는 자녀들에게「서민처럼 생활을 하라고」타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자녀들의 통학 때에는 자가용을 태우지 않도록 고집을 했다. 근혜양이 원효로 4가에 있는 성심여자중학교를 통학할 때 꼬박 전차나 버스로 다녔다. 이런 육여사의 검소하고 서민적인 어머니를 본받아 근혜양은 스타킹까지 꿰매 신고 다닐 정도였다.
근혜양이 대학을 진학할 때, 육여사는 될 수 있으면 여성답게 인문계 학과(사학 전공)를 택하길 바랐다. 그러나 우리나라 산업 현실에서 전자산업이라는 분야에 대한 앞으로의 기대가 크고, 전자산업 분야에 참여해 보고자하는 딸의 생산적인 의욕과 주장을 존중해 대신 힘과 용기가 되주었다.
육여사는 자녀들이 학교에서 가지고 온 시험 답안지를 비롯하여 학교 숙제와 그림 공작물, 작문, 성적표를 모두 모아 놓았다. 그것들을 자녀들이 결혼하게 될 때 어린 시절부터의 사진과 함께 며느리와 사위에게 선물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늘진곳을 찾아서
육여사는 <일하는 퍼스트 레이디>였다. 이 겨레 어느 한구석의 불행에도 무심치 않았던 여사였다.
육여사는 양지회 설립을 비롯해서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의 창간, 서울 남산의 어린이회관, 어린이 대공원, 보광동의 정수직업훈련원, 서울대 기숙사인 정영사,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여성회관 건립 등등에 이르기까지 각가지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양로원과 고아원은 육여사의 따뜻한 손길을 받았고 전국 77개소의 음성나환자촌도 육여사의 방문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육여사의 활동은 신문팔이 소년, 낙도 어린이, 정신 박약아, 영세 근로자, 나병환자, 윤락여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쳤다.
71년 9월 육여사가 익산군의 상지나환자촌을 방문하여 뭉그러진 나병환자들의 손을 아무 거리낌없이 감싸쥐었을 때 환자촌은 갑자기 울음바다로 변했던 일도 있었다.
박대통령은 서거 다음날인 16일 밤, 청와대 본관 빈소에서 밤샘을 하며「참 저 사람은 그토록 매사에 지성일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저 사람이 나병환자들을 위문하고 일일이 악수를 한 뒤 그 손을 나한테 그대로 내민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선뜻 그 손을 잡기까지 했다」고 회고를 하여, 육여사의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희생정신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었다.
육여사는 특히 어린이와 노인들을 지극히 대했다. 박대통령께 선물 들어온 술을 몰래 노인들에게 보내 주기도 했다. 또 어린이들이 마음놓고 뛰놀고 배울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쓴 육여사는 70년 7월 어린이회관을 낙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육여사는 문화계 전반에 걸쳐 관심을 두었다. 가난한 시인들에게 시집을 낼 수 있도록 후원해 주기도 해, 시집이 56권이나 간행되었다.
오랜지 빛으로 물든 천지
제 29회 광복절을 앞두고 전국은 서서히 장마 전선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에는 서울에 0.3 밀리의 이슬비가 내렸을 뿐 동녘엔 구름이 걷히고 찔끔거리던 하늘도 갰다.
15일 10시 20분 육여사가 범인의 흉탄을 맞은 지 2분 뒤인 10시 22분부터 하늘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이 비는 육여사가 서울대 부속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기 시작한 10시 40분까지 내렸다. 이때의 강우량이 0. 2밀리였다.
육여사가 수술을 받기 시작하자 바로 그 순간부터 하늘도 슬픔을 억누르고 쾌유를 비는 듯 서울 지방에선 비가 내리지 않았다.
수술을 시작한 지 30분이 흘렀다. 그리고 또 10분이 흘렀다. 수술을 맡은 의사들의 얼굴에는 절망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하늘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듯 1시 20분부터 좍좍 비를 쏟아냈다.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육여사가 서거한 7시까지 28. 5밀리의 비가 내렸다.
하오 7시. 육여사가 운명을 했다. 이 순간 하늘에 이변이 일어났다. 비가 그치고 흑회색으로 흐려있던 하늘이 갑자기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건물의 벽도, 창문도, 온통 오렌지빛이었다.
이 오렌지빛은 약 30분 동안 서울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육여사의 운구가 서울대 부속병원을 떠나 청와대에 도착하자 그 빛은 차차 엷어져 갔다.
이 빛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혼의 세계에서 육여사의 성스런 영혼을 맞기 위한 극락세계의 주황색 가교가 드리워진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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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3.01.23
  • 저작시기2003.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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