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당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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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당쟁의 발단

2. 사화(士禍)의 발생

3. 동인과 서인에서 당파 비롯

4. 숙종의 환국 정치

5. 노론과 소론의 시대

6. 정조의 탕평론과 왕권강화

7. 세도정치의 서막

8. 신유박해와 농민항쟁

9. 헌종의 시대

10.실학의 갈래

11.정리하면서...

본문내용

심은 더욱 흉흉해졌고 이에 헌종은 기해박해(1838)라는 오가작통법을 사용한 대대적인 천주교인 학살로 응했다. 이때 외국 신부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도 처형되었다.
한편 헌종의 재위기간동안 우리나라는 상당한 문화적 업적을 이루었다. 열성지장, 동국사략, 동국문헌비고등을 편하였을 뿐 아니라 헌종 자신이 시문에 무척 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헌종은 1849년 6월 창덕궁에서 한 점 혈육도 남기지 못하고 죽고 철종이 즉위하게된다.
실학의 갈래
조선왕조의 지배적인 사상인 주자학은 12세기부터 들어왔지만 16세기 퇴계에 의해 한국적인 주자학으로 정착되었다. 지식인 관료들은 도덕적 수양을 갖추어야만 지식인이나 관료로서의 자격을 가진다고 여겼고 이황이 성학10도를 왕에게 바친 것이나 이이가 성학집요를 지은것도 그러한 의도에서였다. 이황에 의하여 집대성된 조선적 주자학은 동·서인을 막론하고 정치이론의 주축이 된다. 인조반정이후 서인이 정권을 차지하자 서인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송시열에 의하여 이러한 주자학은 존주대의와 함께 서인의 집권 이데올로기가 된다. 인조는 광해군이 국가의 가장 큰 명분인 존명사대를 어겼고 임해군,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유폐했음으로 주자학인 강상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반정성공을 하지만 병자호란때 명나라를 배반한 후금에게 항복함으로써 반정명분에 저촉된다. 송시열의 스승인 김집과 선배인 김상헌은 오랑캐인 후금에게 끝까지 버티지 못한 것을 맹렬히 공격하지만 같은 서인들인 최명길, 장유등은 명분도 좋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백성을 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후 현실주의적이고 주관적 관념인 양명학에 경도하게 되어 정제두의 양명학을 낳게되고 소론계열의 강화학파의 양명학까지 연결되게된다.
한편 송시열과 윤휴는 당파는 다르지만 본래 사이가 좋았으나 윤휴가 주자학을 비판하자 사문난적으로 몰아 결별하고 현종대의 예송으로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번졌고 양당은 원수가 된다. 경신환국(1680)으로 남인이 완전히 쫓겨나자 이익은 윤휴와 같이 실증적으로 새로운 해석법 방법을 택하는데 물밀듯이 들어오는 서학에 남인 학자들이 맨 먼저 경론되기 시작하였고 반체제의 일환으로 남인의 일부는 서학과 천주교를 신봉하게된다. 송시열등 노론의 존화주의를 비판하는 일부 노론계 소외인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송시열의 북벌 현실성을 비판하고 오히려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배워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모든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지만 조선후기의 정국이 계속 존화주의를 맹신하는 노론계들이 주도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근대적인 사고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정리하면서...
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선조때부터 정권을 장악한 사림파는 숙종초까지 붕당정치를 구현하며 정파간 균형이 이루어져왔다. 중세기 당쟁은 전세계적인 현상으로써 나라마다 그 양상이 다를뿐 유럽에서도 분권제아래 귀족간의 정쟁은 있었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왕이 그 중점에 서서 균형을 유지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정쟁의 피해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하게 된 사림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왕권에 위협이 되기 시작한다. 특히 각 정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들은 왕권을 행사하는데 있어 여러 가지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파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인재를 등용하고자하나 그럴 경우 자신의 지지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것이었다. 당쟁의 와중에서 왕권은 더욱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신권은 신장되어 왕이 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이러한 때 숙종은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환국정치라는 수단을 이용하는데 이는 왕권이 불안하고 신권이 비대해진 현실에서 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숙종은 서·남인간의 대립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 시대에 일어난 잦은 환국은 이후 정파간의 대립을 더욱 가중시키게 되며 특히 정유독대(1717)를 통한 노론과의 밀실정치는 치세의 허점으로 남게된다.
정조와 다산의 만남
정조의 치세는 영조대의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영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총체적인 제도 개혁을 도모하였으며 완론 탕평을 통해 정국 안정을 도모하고자했다. 그러나 노론의 도움으로 왕위에 즉위할 수 있었던 영조는 탕평 정치에 한계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영조대에 어느정도 다져진 탕평 정치를 줄기차게 밀고 나갔으며 친위세력을 키워 강력한 통치권을 구사하였다. 그는 정치세력을 모으고 기득권세력을 뿌리뽑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적절한 타협을 모색하는 등 정치수완을 발휘하였다. 한편 정조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면서 불평등관계에 있는 하층민의 소외정책을 개선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정책을 폈다. 아울러 문벌 양반의 비리와 횡포에 채찍을 들이대고 그들이 거머쥔 특권을 분산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분명히 서얼, 중인, 노비의 처지가 이전보다 훨씬 개선되었다. 이러던 중
정조는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 진보적인 학자들을 곁에 두고 서양문물의 수용과 농업정책 개혁에 관한 관한 이들의 견해에 귀기울인다.
특히 다산은 문장과 경학에 뛰어났으며 기중가설에 의한 활차녹로를 만들어 이를 수원성 축조에 이용하여 뛰어난 과학기술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다산은 기호남인계로서 경세치용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 그의 높은 학문 수준은 실학의 세 유파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다산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편 정조는 분명한 의지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보수반동세력의 반대와 그에 이른 죽음으로 개혁은 미완성에 그치고 만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정치와 아울러 문벌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으나 미완에 그친 까닭으로 19세기에 들어오히려 자신들이 키운 새로운 문벌인 경주김씨와 안동김씨와 반남박씨와 풍양조씨에 의해 세도 정치가 자행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정조때 개혁이 완성되었거나 뒤에 즉위한 순조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으면 우리의 근대사가 아마도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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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3.20
  • 저작시기2003.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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