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14세기 후반 영국의 정치․사회적 상황
3. 중세 농민들의 생활 수준 변화
4. 농민반란 전개와 그 성격
5. 농민반란의 원인 고찰
6. 맺음말
2. 14세기 후반 영국의 정치․사회적 상황
3. 중세 농민들의 생활 수준 변화
4. 농민반란 전개와 그 성격
5. 농민반란의 원인 고찰
6. 맺음말
본문내용
하나의 강령속에서 자유와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오랜 요구와 융합되어 나타났다고 보아진다.
(5)참여계층
반란군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지위는 쉽게 정의할 수 없지만 봉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주변인'이 아니라 주로 약간의 토지와 재산을 보유한 사람들로, 바꿔말하면 반란군의 대부분은 농민과 수공업자였다. 예를 들어 봉기의 중심지역인 Kent·Esses·허트포드셔·Suffolk 4개 주에서 축출한 반란군 36명의 최소한의 보유지 크기를 분석해 볼 때 15명은 14에이커나 그 이상을 보유하였고, 그들 중 2명만이 32에이커 이상을 보유하였다. 9명은 7에이커에서 12에이커를 보유하였고 12명은 5에이커나 그 이하를 보유한 소토지보유농이었다. 소토지보유 및 약간의 토지를 보유한 반란군들은 임금노동이나 수공업 또는 교역의 추구를 통하여 대안적인 소득의 원천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Esses의 차일더디취 코그샬 수도원의 하인처럼, 장원의 직영지 하인도 반란에 가담하였다.
한편 반란의 지도자들은 가난에 의해 절망한 빈농이 아니라 그들의 보유지를 확대시키기를 바라는 부유한 자들로서, Suffolk의 봉기자인 Thomas Sampson, G. Cobbe, John Cook, William Bokenham, Fobbing, Esses의 8명의 봉기자들 중의 한 사람인 William Gildeborne등과 같은 독립자영농(Yeomen)들은 비록 수적으로 소수였지만 반란에 일정부분 공헌하였다.
) R. H. Hilton, Band Men Made Free, pp.180-181. 안방선, 전논문 pp.44-46에서 재인용.
6. 맺음말
이제까지 1381년 영국 농민반란이 일어난 14세기 후반의 전반적 사회 분위기와 농민반란의 원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14세기 전반에 걸친 영국 사회의 객관적 사회구조의 조건에 의하여 또 그에 대응하는 영국 농민의 지속적인 저항의 맥락 속에서 1381년 농민반란이 발발하였다. 1381년 농민반란은 모든 불만의 요소를 모았으며 혁명적 열기에 빠져있던 사람들이나 정치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분출구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불안하였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모순과 변화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의 외침이 나온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성공하지 못하고 반란에 그쳤지만 이는 영국 역사상 큰 영향을 미쳤다. 에섹스, 켄트 2주에서 거의 동시에 반란이 일어나 남동부를 중심으로 전국 37개주 중에서 28개주에 미치는 대반란으로 번졌던 1381년 농민반란은 그들의 목적의 성취에 관한한 확실히 패배하였다. 이와같이 1381년 반란이 실패하게된 외적인 원인은 봉건지배자들의 책략과 대상인들의 배반으로 인해서였다. 대상인들은 반란군이 런던에 진입하였을 때 상업에 대한 지배층의 제 규정에 반대하여 반란군을 도왔으나 반란군이 런던의 지배층의 제 규정에 반대하여 반란군을 도왔으나 반란군이 런던의 지배층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대해 나감에 따라 자기 소유의 위험성을 느끼게 되어 봉건지배층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 유공조, "1381년 영국의 농민폭동", 「경희사학」1집, 1967, p.119.
반란이 실패한 농민 경제 자체의 성격으로써, 첫째 농민이 원시적 농촌사회에서 소상품 생산자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집중되지 못하고 고립·분산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농민들은 분산된 생활의 불안정 때문에 경제적으로 상인과 고리대의 지배를 받았으며, 정치적으로 무능하였다. 마지막으로 농민들의 국왕에 대한 환상을 들 수 있다. 국왕은 곧 법의 원천으로서 정의의 사도이고, 공정한 징벌자이고, 약자의 보호자라는 신뢰를 지니고, 리차드 국왕이 자신들을 위해 행정권력을 행사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 박은구·이연규 역, op. cit., p.32.
그러나 1381년 반란은 중세의 모든 봉기처럼 실패하였지만 봉건 사회의 변화와 관계를 맺으면서 나타난 그 의미와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다고 본다. 1381년 농민반란은 이후 계속된 투쟁들과 더불어 영국에서의 봉건적·영주제적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기여하였고 그럼으로서 농업자본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나아가 농민들은 단순히 역사의 수동적 희생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간 능동적 참여자들로 자리잡았다. 그들의 투쟁이 역사발전 전체에 있어서―정치, 사회경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가치와 이념에 있어서도―뜻깊은 것이었으며 이후 세대의 경험과 투쟁에도 기여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즉 계급투쟁으로서의 농민운동은 부분적으로 중세의 사회변동 및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중세시대라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점에서 볼 때 농민운동은 필연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의 투쟁에 끼친 공헌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 참고문헌
박은구·이연규 엮음, 『14세기 유럽사』, 탐구당, 1987.
해리슨, 이영석 옮김, 『영국민중사』, 소나무, 1989.
돕 M. 외, 지동식·이춘란 외역, 『봉건제도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 법문사, 1983.
돕 M. 외, 김대환 역, 『자본주의 이행논쟁』, 동녁, 1984.
김석민 역,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새로운 전개』, 아침, 1987.
안방선, "1381년 영국 농민봉기의 성격에 관한 연구", 「고대석사논문」, 1989.
안방선, "'봉건제의 위기'의 성격과 영국의 경제적 변화," 「서양 고대와 중세의 사 회」, 1993.
유공조, "1381년 영국의 농민폭동," 「경희사학」1,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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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중세 말의 천민왕국 사상과 하층민의 난," 「동국사학」19·20,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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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욱, "중세 말 영국 바넷 장원에서의 토지거래의 성격과 농민층 분화," 「서양사 론」48, 1996.
성백용, "1358년 자끄리와 프랑스 농촌의 위기," 「서양사연구」13, 1992.
(5)참여계층
반란군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지위는 쉽게 정의할 수 없지만 봉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주변인'이 아니라 주로 약간의 토지와 재산을 보유한 사람들로, 바꿔말하면 반란군의 대부분은 농민과 수공업자였다. 예를 들어 봉기의 중심지역인 Kent·Esses·허트포드셔·Suffolk 4개 주에서 축출한 반란군 36명의 최소한의 보유지 크기를 분석해 볼 때 15명은 14에이커나 그 이상을 보유하였고, 그들 중 2명만이 32에이커 이상을 보유하였다. 9명은 7에이커에서 12에이커를 보유하였고 12명은 5에이커나 그 이하를 보유한 소토지보유농이었다. 소토지보유 및 약간의 토지를 보유한 반란군들은 임금노동이나 수공업 또는 교역의 추구를 통하여 대안적인 소득의 원천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Esses의 차일더디취 코그샬 수도원의 하인처럼, 장원의 직영지 하인도 반란에 가담하였다.
한편 반란의 지도자들은 가난에 의해 절망한 빈농이 아니라 그들의 보유지를 확대시키기를 바라는 부유한 자들로서, Suffolk의 봉기자인 Thomas Sampson, G. Cobbe, John Cook, William Bokenham, Fobbing, Esses의 8명의 봉기자들 중의 한 사람인 William Gildeborne등과 같은 독립자영농(Yeomen)들은 비록 수적으로 소수였지만 반란에 일정부분 공헌하였다.
) R. H. Hilton, Band Men Made Free, pp.180-181. 안방선, 전논문 pp.44-46에서 재인용.
6. 맺음말
이제까지 1381년 영국 농민반란이 일어난 14세기 후반의 전반적 사회 분위기와 농민반란의 원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14세기 전반에 걸친 영국 사회의 객관적 사회구조의 조건에 의하여 또 그에 대응하는 영국 농민의 지속적인 저항의 맥락 속에서 1381년 농민반란이 발발하였다. 1381년 농민반란은 모든 불만의 요소를 모았으며 혁명적 열기에 빠져있던 사람들이나 정치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분출구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불안하였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모순과 변화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의 외침이 나온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성공하지 못하고 반란에 그쳤지만 이는 영국 역사상 큰 영향을 미쳤다. 에섹스, 켄트 2주에서 거의 동시에 반란이 일어나 남동부를 중심으로 전국 37개주 중에서 28개주에 미치는 대반란으로 번졌던 1381년 농민반란은 그들의 목적의 성취에 관한한 확실히 패배하였다. 이와같이 1381년 반란이 실패하게된 외적인 원인은 봉건지배자들의 책략과 대상인들의 배반으로 인해서였다. 대상인들은 반란군이 런던에 진입하였을 때 상업에 대한 지배층의 제 규정에 반대하여 반란군을 도왔으나 반란군이 런던의 지배층의 제 규정에 반대하여 반란군을 도왔으나 반란군이 런던의 지배층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대해 나감에 따라 자기 소유의 위험성을 느끼게 되어 봉건지배층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 유공조, "1381년 영국의 농민폭동", 「경희사학」1집, 1967, p.119.
반란이 실패한 농민 경제 자체의 성격으로써, 첫째 농민이 원시적 농촌사회에서 소상품 생산자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집중되지 못하고 고립·분산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농민들은 분산된 생활의 불안정 때문에 경제적으로 상인과 고리대의 지배를 받았으며, 정치적으로 무능하였다. 마지막으로 농민들의 국왕에 대한 환상을 들 수 있다. 국왕은 곧 법의 원천으로서 정의의 사도이고, 공정한 징벌자이고, 약자의 보호자라는 신뢰를 지니고, 리차드 국왕이 자신들을 위해 행정권력을 행사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 박은구·이연규 역, op. cit., p.32.
그러나 1381년 반란은 중세의 모든 봉기처럼 실패하였지만 봉건 사회의 변화와 관계를 맺으면서 나타난 그 의미와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다고 본다. 1381년 농민반란은 이후 계속된 투쟁들과 더불어 영국에서의 봉건적·영주제적 체제를 붕괴시키는데 기여하였고 그럼으로서 농업자본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나아가 농민들은 단순히 역사의 수동적 희생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간 능동적 참여자들로 자리잡았다. 그들의 투쟁이 역사발전 전체에 있어서―정치, 사회경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가치와 이념에 있어서도―뜻깊은 것이었으며 이후 세대의 경험과 투쟁에도 기여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즉 계급투쟁으로서의 농민운동은 부분적으로 중세의 사회변동 및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중세시대라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점에서 볼 때 농민운동은 필연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의 투쟁에 끼친 공헌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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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민 역,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새로운 전개』, 아침, 1987.
안방선, "1381년 영국 농민봉기의 성격에 관한 연구", 「고대석사논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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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중세 말의 천민왕국 사상과 하층민의 난," 「동국사학」19·20, 1986.
이기영, "고전 장원제 하 농민의 생활 수준," 「서양사론」45, 1995
고동욱, "중세 말 영국 바넷 장원에서의 토지거래의 성격과 농민층 분화," 「서양사 론」48, 1996.
성백용, "1358년 자끄리와 프랑스 농촌의 위기," 「서양사연구」13,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