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머리말
Ⅱ.민세 안재홍의 주요 활동
1. 출생과 유학시절
2. 귀국후의 국내활동
3. 해방후의 국가건설활동
Ⅲ.안재홍의 신민족주의론
1. 통합민족국가의 건설
2. 신민주주의론과 균등사회건설
Ⅳ.신민족주의 국가상(정치 제도)
1. 국호와 국체
2. 정부형태와 참정권
3. 민족반역자 처리문제
Ⅴ.맺음말
Ⅱ.민세 안재홍의 주요 활동
1. 출생과 유학시절
2. 귀국후의 국내활동
3. 해방후의 국가건설활동
Ⅲ.안재홍의 신민족주의론
1. 통합민족국가의 건설
2. 신민주주의론과 균등사회건설
Ⅳ.신민족주의 국가상(정치 제도)
1. 국호와 국체
2. 정부형태와 참정권
3. 민족반역자 처리문제
Ⅴ.맺음말
본문내용
화의 향상·완성과 밀접한 고리를 맺고 있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의 민족문화가 어떤 특수계층에 국한되었음을 반성·비판하면서, 농민·노동자 등 '전인민층'에 민족문화를 보급해야한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제도교육에서는 일정한 학령의 의무교육제도와 실과교육, 사회교육의 측면에서는 성인교육·농촌계몽 등을 강조하면서, 모든 교육에서의 민족의식에 기초를 두고 민족문화를 앙양하는데 궁극적인 목표를 두었다.
3. 민족반역자 처리문제
그는 반민족행위자 처리문제에 대하여 '先반민자처단 後정부수립'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처단'이란 모든 반민자를 법률로 구속하여 처벌·단죄하는 쪽보다는, 유용한 인재를 가려내어, 즉 사면하여 조국재건에 활용하는 '건설적' 방안을 가리켰다. 또 그는 처단의 시기를 '8.15직후'로 설정하였다. 그가 말하는 '처단'을 단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반민자를 규정하고 처단을 실행할 구심점이 있어야 했는데, 그가 참여하였던 〈건준〉·〈비상국민회의〉·〈민주의원〉·〈입법의원〉은 모두 이를 결행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처단'의 시기와 방향지침은 언급하면서도, 반민자의 명확한 규정이나, 처단의 구심점 또는 주체를 뚜렷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8.15해방 직후 안재홍은 일제와 같은 세력으로 인정되는 민족반역자 - 이후 '친일거두'로 표현되는 - 는 민족통일전선에서 애초 배제하지만. '관리'나 '일반협력자'들은 그들이 국가건설에 새로이 봉사하는 정신으로 적극 참여하는 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그는 반민자 문제를 다룰 때, 민족대의·민족정서에서 처벌이라는 관점보다는 국가건설에 유용한 인력을 활용한다는 실용의 측면에서 접근했던 것이다.
반민자 처벌에 대한 그의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그는 민중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는데, 그가 그러한 주장을 한 이유는 다음의 몇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 김인식, 2002 《안재홍의 만민공화의 국가상〉《민족에서 세계로》, 봉명, p.107.
①40년이라는 일제침략 기간동안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지극히 어려운 조건이었으므 로 사소한 친일행위는 자비를 베풀수도 있다는 관용론적 입장.
②새로운 조국을 건설하기 위한 기술가·전문가·사무가 등의 필요성.
③친일파·반민자 처단이 세력관계에 제약되어 불공평하게 처리됨과 정략에 이용됨을 경계 함.
④개인적인 욕심이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합법공간에서 민족의 이익을 위해 관 직에 진출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직위보다는 실제의 향위를 처벌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때문이었다.
Ⅴ.맺음말
지금까지 民世 安在鴻의 신민족주의적 정치사상과 그가 제시한 구체적인 국가상을 살펴보았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론은 8.15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여러 가지로 분열되었던 한국민족운동과 건국운동의 이념을 포용하려는 제 3의 민족주의 이념으로 창출되었다. 신민족주의론은 민족분열을 극복하고 만민공생을 이상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상을 실천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민족의 단결을 주장하였다.
안재홍은 서구 사회가 달성한 물질적 성과 또는 정신적 가치 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체제의 결함을 지적하였다. 그는 민족의 계급과 갈등을 극복하는 통합의 원리를 추구함으로써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상호 접근을 꾀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선 제 3의 통합체제를 제시했다. 또한 민족주의 안에 민주주의의 의의를 각인시키고,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의 공존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민족의 배타성·국수성·복고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론은 당대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좌익으로부터는 "계급의식을 희석시키는 소부르주아자"로, 우익으로부터는 "조선식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좌우통합의 중심이 되기 보다 오히려 좌우로부터 고립되었다. 일제 시기와 해방 공간은 격렬한 좌우투쟁의 공간이었으며, 중간파가 설 입지가 좁았고, 전형적인 인텔리였던 그는 대중의지지 기반이 취약했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는 관념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그가 생각한 국가는 구체적인 대안을 세우는데 실패하여 대중에게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성취하여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 상호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고, 좌우의 충돌을 지양할 대안을 사상 또는 체제 차원에서 모색한 점은 높이 평가할 점이다. 그는 해방정국의 혼란한 상황에서 공산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宣傳과 煽動을 논리적으로 극복하고 친일세력과 연계된 극단적인 우익의 弊害를 지양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은 통일이라는 명확한 과제가 있다. 언젠가는 통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안재홍과 같은 국가상의 제시는 우리 민족이 통일되었을 때의 국가상에 대한 한 지표가 될 수있다. 바람직한 국가상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많이 이뤄져야 하며, 이러한 점에서 안재홍의 사상은 충분히 논의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1) 安在鴻選集刊行委員會 編, 1981∼1991 《民世安在鴻選集1-5》, 지식산업사.
2) 김인식, 1988 《安在鴻의 新民族主義 思想과 運動》, 중앙대학교 출판사 .
3) 김인식, 2002 《안재홍의 만민공화의 국가상〉《민족에서 세계로》, 봉명.
4) 김인식, 1998 〈안재홍의 민족주의와 신민족주의론〉《白山學報》50특집호.
5) 兪炳勇, 1995 〈安在鴻의 新民族主義 國家像〉《韓國史市民講座》제17집, 一潮閣.
6) 安在鴻, 1945 《新民族主義와 新民主主義》, 민우사.
7) 이지원, 1991 〈일제하 안재홍의 현실인식과 민족해방운동론〉《역사와 현실》 제6호, 역사비평사.
8) 진덕규, 1979 《한국의 민족주의》, 현대사상.
9) 韓永愚, 1987 〈安在鴻의 新民族主義와 史學〉《한국독립운동사연구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0) 박찬승, 2000 〈일제 지배하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과 분화〉《한국독립운동사 연구》 15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1) 兪炳勇, 1986 〈安在鴻의 政治思想에 관한 再檢討〉《한국민족운동사연구1》, 知識産 業社.
12) http://www.dbchosun.com/lear/ 조선일보데이터벵크 사설검색.
3. 민족반역자 처리문제
그는 반민족행위자 처리문제에 대하여 '先반민자처단 後정부수립'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처단'이란 모든 반민자를 법률로 구속하여 처벌·단죄하는 쪽보다는, 유용한 인재를 가려내어, 즉 사면하여 조국재건에 활용하는 '건설적' 방안을 가리켰다. 또 그는 처단의 시기를 '8.15직후'로 설정하였다. 그가 말하는 '처단'을 단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반민자를 규정하고 처단을 실행할 구심점이 있어야 했는데, 그가 참여하였던 〈건준〉·〈비상국민회의〉·〈민주의원〉·〈입법의원〉은 모두 이를 결행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처단'의 시기와 방향지침은 언급하면서도, 반민자의 명확한 규정이나, 처단의 구심점 또는 주체를 뚜렷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8.15해방 직후 안재홍은 일제와 같은 세력으로 인정되는 민족반역자 - 이후 '친일거두'로 표현되는 - 는 민족통일전선에서 애초 배제하지만. '관리'나 '일반협력자'들은 그들이 국가건설에 새로이 봉사하는 정신으로 적극 참여하는 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그는 반민자 문제를 다룰 때, 민족대의·민족정서에서 처벌이라는 관점보다는 국가건설에 유용한 인력을 활용한다는 실용의 측면에서 접근했던 것이다.
반민자 처벌에 대한 그의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그는 민중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는데, 그가 그러한 주장을 한 이유는 다음의 몇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 김인식, 2002 《안재홍의 만민공화의 국가상〉《민족에서 세계로》, 봉명, p.107.
①40년이라는 일제침략 기간동안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지극히 어려운 조건이었으므 로 사소한 친일행위는 자비를 베풀수도 있다는 관용론적 입장.
②새로운 조국을 건설하기 위한 기술가·전문가·사무가 등의 필요성.
③친일파·반민자 처단이 세력관계에 제약되어 불공평하게 처리됨과 정략에 이용됨을 경계 함.
④개인적인 욕심이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합법공간에서 민족의 이익을 위해 관 직에 진출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직위보다는 실제의 향위를 처벌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때문이었다.
Ⅴ.맺음말
지금까지 民世 安在鴻의 신민족주의적 정치사상과 그가 제시한 구체적인 국가상을 살펴보았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론은 8.15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여러 가지로 분열되었던 한국민족운동과 건국운동의 이념을 포용하려는 제 3의 민족주의 이념으로 창출되었다. 신민족주의론은 민족분열을 극복하고 만민공생을 이상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상을 실천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민족의 단결을 주장하였다.
안재홍은 서구 사회가 달성한 물질적 성과 또는 정신적 가치 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체제의 결함을 지적하였다. 그는 민족의 계급과 갈등을 극복하는 통합의 원리를 추구함으로써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상호 접근을 꾀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선 제 3의 통합체제를 제시했다. 또한 민족주의 안에 민주주의의 의의를 각인시키고,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의 공존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민족의 배타성·국수성·복고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론은 당대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좌익으로부터는 "계급의식을 희석시키는 소부르주아자"로, 우익으로부터는 "조선식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좌우통합의 중심이 되기 보다 오히려 좌우로부터 고립되었다. 일제 시기와 해방 공간은 격렬한 좌우투쟁의 공간이었으며, 중간파가 설 입지가 좁았고, 전형적인 인텔리였던 그는 대중의지지 기반이 취약했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는 관념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그가 생각한 국가는 구체적인 대안을 세우는데 실패하여 대중에게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성취하여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 상호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고, 좌우의 충돌을 지양할 대안을 사상 또는 체제 차원에서 모색한 점은 높이 평가할 점이다. 그는 해방정국의 혼란한 상황에서 공산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宣傳과 煽動을 논리적으로 극복하고 친일세력과 연계된 극단적인 우익의 弊害를 지양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은 통일이라는 명확한 과제가 있다. 언젠가는 통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안재홍과 같은 국가상의 제시는 우리 민족이 통일되었을 때의 국가상에 대한 한 지표가 될 수있다. 바람직한 국가상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많이 이뤄져야 하며, 이러한 점에서 안재홍의 사상은 충분히 논의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1) 安在鴻選集刊行委員會 編, 1981∼1991 《民世安在鴻選集1-5》, 지식산업사.
2) 김인식, 1988 《安在鴻의 新民族主義 思想과 運動》, 중앙대학교 출판사 .
3) 김인식, 2002 《안재홍의 만민공화의 국가상〉《민족에서 세계로》, 봉명.
4) 김인식, 1998 〈안재홍의 민족주의와 신민족주의론〉《白山學報》50특집호.
5) 兪炳勇, 1995 〈安在鴻의 新民族主義 國家像〉《韓國史市民講座》제17집, 一潮閣.
6) 安在鴻, 1945 《新民族主義와 新民主主義》, 민우사.
7) 이지원, 1991 〈일제하 안재홍의 현실인식과 민족해방운동론〉《역사와 현실》 제6호, 역사비평사.
8) 진덕규, 1979 《한국의 민족주의》, 현대사상.
9) 韓永愚, 1987 〈安在鴻의 新民族主義와 史學〉《한국독립운동사연구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0) 박찬승, 2000 〈일제 지배하 한국 민족주의의 형성과 분화〉《한국독립운동사 연구》 15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1) 兪炳勇, 1986 〈安在鴻의 政治思想에 관한 再檢討〉《한국민족운동사연구1》, 知識産 業社.
12) http://www.dbchosun.com/lear/ 조선일보데이터벵크 사설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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