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1. 전 서 (篆 書)
1)석고문 (石鼓文)
2)태산각석 (泰山刻石)
3)낭아대각석 (瑯牙臺刻石)
2. 예 서 (隸 書)
1)을영비 (乙瑛碑)
2)예기비 (禮器碑)
3)사신비 (史晨碑)
4)서협송 (西狹頌)
5)조전비 (曺全碑)
6)장천비 (張遷碑)
3. 해 서 ( 楷 書 )
1)장맹룡비 (張孟龍碑)
2)고정비 (高貞碑)
3)구성궁예천명 (九成宮醴天銘)
4)안근례비 (顔勤禮碑)
4. 행 서 ( 行 書 )
1)난정서 (蘭亭序)
2)집자성교서 (集字聖敎序)
<참고 문헌>
1. 전 서 (篆 書)
1)석고문 (石鼓文)
2)태산각석 (泰山刻石)
3)낭아대각석 (瑯牙臺刻石)
2. 예 서 (隸 書)
1)을영비 (乙瑛碑)
2)예기비 (禮器碑)
3)사신비 (史晨碑)
4)서협송 (西狹頌)
5)조전비 (曺全碑)
6)장천비 (張遷碑)
3. 해 서 ( 楷 書 )
1)장맹룡비 (張孟龍碑)
2)고정비 (高貞碑)
3)구성궁예천명 (九成宮醴天銘)
4)안근례비 (顔勤禮碑)
4. 행 서 ( 行 書 )
1)난정서 (蘭亭序)
2)집자성교서 (集字聖敎序)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전 서 (篆 書)
1)석고문 (石鼓文)
대전 자체(字體)의 가장 구체적인 작품이며,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각석으로 북 모양으로 다듬은 돌에 새겨져 있다 하여 석고 문이라 부른다. 돌의 수는 10개이고 표면에 700여자가 실려 있으나, 판독이 가능한 글자 수는 270여자,현재 통용되고 있는 글자 수는 470여자 정도이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동주의 위열왕 4년(기원전 481)에 진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석고문은 4언구로 현재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전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 냥을 하는 것과 영토의 개척으로 도읍을 세운 것, 제사에 관한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석고문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자체는 대체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중략]
2. 예 서 (隸 書)
1)을영비 (乙瑛碑)
후한의 환제(桓帝)때에 노나라의 재상 을영의 신청에 의하여 공자묘에 묘를 관리하는 사람을 두게 한 것을 기술하고, 을영 이하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문은 18행,각 행에 14자로 되어 있다. 결구가 잘 맞춰져 있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조전비에서처럼 중심으로 밀집시키고 좌우 양면으로 세를 확장시켜 내는 결구 도 아니며, 장천비처럼 방형안에 필획을 제한시키는 결구형식도 아니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소박하면서도 경부 한 느낌을 주지 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한 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중략]
4. 행 서 ( 行 書 )
1)난정서 (蘭亭序)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1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和)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하에 성대하고 풍아(風雅)로운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각지의 명사들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난정집을 엮었다. 여기에 왕 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가 된 것이다. 즉석에서 시편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니라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 제 일의 행서`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석고문 (石鼓文)
대전 자체(字體)의 가장 구체적인 작품이며,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각석으로 북 모양으로 다듬은 돌에 새겨져 있다 하여 석고 문이라 부른다. 돌의 수는 10개이고 표면에 700여자가 실려 있으나, 판독이 가능한 글자 수는 270여자,현재 통용되고 있는 글자 수는 470여자 정도이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동주의 위열왕 4년(기원전 481)에 진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석고문은 4언구로 현재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전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 냥을 하는 것과 영토의 개척으로 도읍을 세운 것, 제사에 관한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석고문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자체는 대체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중략]
2. 예 서 (隸 書)
1)을영비 (乙瑛碑)
후한의 환제(桓帝)때에 노나라의 재상 을영의 신청에 의하여 공자묘에 묘를 관리하는 사람을 두게 한 것을 기술하고, 을영 이하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문은 18행,각 행에 14자로 되어 있다. 결구가 잘 맞춰져 있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조전비에서처럼 중심으로 밀집시키고 좌우 양면으로 세를 확장시켜 내는 결구 도 아니며, 장천비처럼 방형안에 필획을 제한시키는 결구형식도 아니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소박하면서도 경부 한 느낌을 주지 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한 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중략]
4. 행 서 ( 行 書 )
1)난정서 (蘭亭序)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1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和)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하에 성대하고 풍아(風雅)로운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각지의 명사들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난정집을 엮었다. 여기에 왕 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가 된 것이다. 즉석에서 시편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니라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 제 일의 행서`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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