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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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댄스 스포츠란?

2. 댄스 스포츠의 가치
■ 생리학적 가치
■ 스포츠학적 가치
■ 레크레이션적 가치
■ 예술적 가치

3. 댄스 스포츠의 기본 예절
■ 복장 예절
■ 춤 신청 예절
■ 풀오버 예절
■ 파트너 예절

4. 댄스 스포츠의 종류
■ 라틴 댄스
■ 모던 댄스

5. 댄스 스포츠의 역사
■ 라틴 아메리커의 역사
■ 모던 볼륨 댄스의 역사
■ 한국의 댄스 스포츠 발달 현황

본문내용

댄스스포츠 발달 현황
댄스스포츠로서 볼룸 댄스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람들과의 사교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며 운동량이 높아 개인의 건강에도 좋다. 이웃 일본은 1860년대에 이미 서양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서양춤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일본은 왈츠와 폴카(Polka)와 같은 춤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생활 방식과 문화 방식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일본 고유의 고전 춤만으로는 새로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현재는 일본도 전 일본댄스연합회와 같은 단체를 조직하여 확립된 댄스협회들을 일원화함과 동시에 댄스 교사 자격을 국가검정으로 하고, 댄스 교사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도 통일하는 등 새로운 문화정책을 수립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890년경에 이하영씨가 미국공사 재임시 보스톤 왈츠(Boston Waltz)라는 멋진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고, 귀국 후에도 서울 종로에 있는 손탁 호텔에서 샴페인을 들며 사교춤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50∼60년전인 1930년경에는 춤에 대한 전문 교사는 없고 쇼단의 안무가였던 윤은석씨가 일본에 자주 왕래하며 춤을 배우고, 영국황실무도교육협회에서 발간한 "Book Dance"라는 책으로 독학을 했다고 한다.
일본이 서양문명을 일찍 수입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볼룸 댄스 수입에 있어서도 그 진도가 매우 느렸던 것이 사실이다.
해방이 되어 미국 군인들의 영향을 받아 서양춤을 다른 문화의 경우와 같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나, 그래도 자유당시대를 거치면서 고위장성급 모임에서는 사교 댄스 파티가 건전하게 부부 동반으로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일부 선각자들 중에서 새로운 생활 방식을 나타내는 서양풍의 사교 댄스를 문화인답게 슬기롭게 배워 하나의 여가 선용을 위한 스포츠로서 배워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서양춤에 대한 이 같은 새로운 가치와 사용법을 제대로 배우고 전파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계몽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과 단체가 많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 고 김종기씨가 체육인으로써 영국에 유학한 경력과 또 많은 국제 모임이나 세미나에 참석한 경험을 가지고 1970년에 한국무도교육협회를 설립한 것은 역사적인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첫 전국 무도선수권대회는 1959년 장충체육관에서 한국일보 주최로 열렸으며, 특히 우리나라는 1988 Olympic Youth Camp에서 주최국으로써 댄스스포츠의 경연대회를 개회하는 등의 업적을 갖게 되었다. 즉, 댄스스포츠가 국위를 선양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서울 올림픽 기념 국제 댄스스포츠 경기대회 직후의 무도학원 양성화 노력과 1990년 체육시설의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계기로 국내 무도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도인들은 무도학원과 무도장을 법적으로 체육시설에 포함시키기 위한 여러 면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실패로 끝나자 관계 당국과 그 당시 유일한 허가단체였던 사단법인 한국무도교육협회에 대한 불만이 크게 고조되었다. 특히, 프로 무도인들은 한국무도교육협회가 ICAD와 ICBD 모두에 가입한 사실에 대해서 큰 불만을 표출하였다. 결국, 한국무도교육협회 김종기 회장은 아마추어 회원들을 중심으로 1990년 2월 한국 아마추어 댄스스포츠협회 (Korea Amateur Sport Dance Committee: KASDC)를 조직하고, 유우봉 회장이 대표가 되어 ICAD에 가입하였다.
반면, 프로 무도인들은 1990년 5월 한국무도평의회 (Korea National Council of Ballroom Dancing)를 조직하고 천정태 회장을 대표로 ICBD에 가입하였다. 이 중 현재 한국 댄스스포츠 연합회(DanceSport Federation of Korea) 박효 회장부부는 유일한 모던 챔피언이며 유력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얼마전 은퇴를 선언했지만 본인들의 자녀를 직접 선수로 키워 한국 아마츄어선수권 결승 1위를 계승시키고 있으며 미국 네바다주 아마추어 선수권 결승 진출(1997년 8월), 미까사배(전일본) 스포츠댄스 선수권대회 월드오픈 결승진출권을 따내는 등의 쾌거를 이루어냈다.
사단법인 한국무도교육협회 박영택 회장은 한국 최초의 라틴 챔피언으로 후계자 양성에 유력한 일인자로 알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는 1991년 풍속영업규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다음 무도계의 지원 육성보다는 무도학원 및 무도장의 설립과 운영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무도인들은 프로와 아마추어 모두 댄스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으며, 그 결과 KASDC는 1996년 IDSF제3회아시아태평양지역 무도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아시아 댄스스포츠연맹의 창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KASDC는 서울 총회에서 단체의 명칭을 한국 댄스스포츠연맹 (Korea Dance sport Federation : KDF)으로 개칭하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1970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한국무도교육협회(Korea Association of Education of DanceSport), 1990년 설립된 한국 댄스스포츠연맹(Korea Amateur Sport Dance Committee), 한국무도평의회(Korea national Council of Ballroom Dancing), 1996년 설립된 한국무도강사협회 (Korea Association Education Ballroom Dancing), 1997년 설립된 대한스포츠댄싱연맹, 1998년 설립된 한국댄스스포츠연합회(DanceSport Federation of Korea) 등 6개의 주요한 무도단체가 있으며, 그 가운데 한국무도평의회는 WD & DSC에 가입하였고, 한국댄스스포츠연맹은 국제댄스스포츠 연맹에 가입해 왔다. 전국적으로 등록된 무도학원은 1천여 개이며, 주요 언론기관 및 문화쎈터에서 댄스스포츠 강좌를 개설하여 운영해 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와 대학부설 사치교육원 등 공공기관이나 대학에서도 댄스스포츠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어 교양강좌로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 가격3,0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03.09.28
  • 저작시기2003.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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