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 한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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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종이 - 한지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들어가는글

Ⅱ. 풀어놓는 글
1.종이의 기원
2.종이의 전래
3.한지의 기원
(1)삼국시대
(2)통일신라시대(서기 668년-935년)
(3)고려시대(918-1392년)
*정책
*쓰임
*유물
*평가
(4)조선시대(1392-1910년)
*정책
*평가
(5)근현대(1910년~)
*정책
*평가
*현대

Ⅲ. 마치는 글

본문내용

원의 강습, 제지 기능공의 단기 강습 등을 하였으며, 우수한 한지 기능공도 보유하였다. 한지 개량을 위한 일반의 기술지도가 주업무였다. 특기할 사항은 중국에서 씨앗을 들여다가 황촉규를 널리 보급시킴으로써 초지용 점제를 통일시킨 일, 대발의 보급과 그 규격의 통일, 제조기술의 표준화 등이다.
한편 1914년 이후 매년 지방비 예산을 책정하여 철판 건조기, 원료 증해용 솥 등 개량기구 구입을 보조 장려하였다.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고가지인 일본의 화지 생산도 일부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시책으로 인하여 1915∼21년 간 저피 생산과 한지 덩이, 생산 가옥수, 닥 식재가 늘어났다. 또한 원가 절감책의 하나로 한지 역사상 처음으로 목재 펄프의 혼용을 시도하였다.
평가
20세기 서양식 종이공장 설립의 영향으로 수초지의 제조에 있어서도 여러 공정에 각종 기계와 화공약품이 천연원료와 수제공정을 대체하였다. 전통 한지는 원래 수록에 의하여 제조되었던 것으로 제지과정이 원시적이고 조악하여 생산량이 많지 못하고 고가인 단점이 있었다. 반면 기계에 의하여 제조되는 양지는 제조과정 하나하나에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며 가격이 저렴하였다. 이와 같이 양지는 값이 싸고 재료로서의 질도 좋은 반면에 한지는 고가이고 또한 국내에 닥의 절대량이 부족하여 그 질이 약해졌으므로 일반대중은 서화재료로서의 한지를 외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지는 대중적인 용도로부터 배제되었고, 일반 대중 사이에 양지의 보급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단축되고 간편하며 경비는 절약되었지만, 한지 본래의 특성은 많이 잃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한지가 고려지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과 여전한 선호열로 생활 필수품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말엽까지도 매년 약 30만 근이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중국에서 한지는 주로 상류사회의 전유물로서 서민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자 한지가 비싼 점, 중국에서 만든 값싼 유사 모조품의 출현, 한지의 품질 규격의 불통일로 수출량은 답보상태였다. 1920년대 와서는 수출이 반감되었다.
일본에서는 한지가 닥 100%로 뜬 강인성과 내구성을 지녀 선호하였다. 다만 품질에 균일성이 없는 것이 수출 상품으로서 단점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그들의 생활양식과 더불어 그들 취향에 맞는 종이를 가지고 왔다. 그리하여 일본 회화양식에 맞는 여러가지 종이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종이도 그들의 취향에 맞는 종이로 만들어졌었다. 우리 문화의 말살 정책으로 우리 한지는 거의 사라져 창호지, 장판지, 장지, 태지등 몇 종류만 명맥을 유지하였다. 한지의 재료부족과 대량생산으로 질의 저하를 가져왔다.
현대
해방후 50년은 한지공업의 붕괴과정이다. 정치·경제·사회적 혼란, 6.25전쟁, 군사 혁명 이후의 선공업 후농촌 정책으로 한지 생산의 기반은 근본적으로 약화되었다. 지방에 있던 협동조합도 군사통치 시대의 통폐합정책으로 맥이 끊기고,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선공업 후농촌 정책으로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생산과 부업구조가 바뀌어 일부를 제외하고는 농민들이 농한기에 부업으로 제조하는 종이가 되었다.
건축양식과 주거 환경의 변화는 한지의 남아있는 양대 지종인 창호지와 장판지의 수요를 격감시켰다. 수요도 한정적이어서 생산되는 종이의 종류도 매우 단순하고 품질도 일반적으로 좋지 못하다. 종이 뜨는 일 자체가 험하므로 인력의 확보와 지장의 훈련이 여의치 못하여 한지공업생산의 귀중한 인적자원인 노련한 기능공들은 제대로 된 후계자들을 양성하지 못한 채 거의 노쇠 사별하여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 전통 수록 한지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하여 가내수공업형태인데 공해배출업이며 인건비도 높아서 경영이 어려웠다. 한 예로 1957년 전북도에 315개 생산업체가 있었으며 종사자가 4,978명이었다. 이것이 1977년 한지공업 협동조합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한지 제조소나 농가는 약 160호로 줄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곳은 전국에 60여 곳에 불과하다.
Ⅲ.
마치는 글
금세기에 들어와 국권의 상실과 광복 후의 동족전쟁, 그리고 60년대 이후의 급격한 산업화-근대화 바람은 그러잖아도 체질이 허약해진 한지의 맥을 거의 끊어 버릴 만큼 빈사상태로 몰고 갔다. 무엇보다도 한지의 명을 재촉한 것은 양지에 밀린 한지수요의 격감이다. 게다가 한옥이 헐리고 아파트가 임립하면서 창호지 장판지조차 유리와 비닐에 밀려 발붙일 곳이 없어져버렸다.
지령 천년을 자랑하던 한지-. 천하제일의 지질을 자랑하던 그 한지는 이제 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책을 쓴 저자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데도 그가 쓴 책종이부터 누렇게 산화되어 먼지가 되어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출판풍토가 참으로 아쉽다.
한지를 회생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천하제일이라 남들이 상찬한 닥 나무의 백추지를 되살릴 길은 없는 것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지의 수요를 회복시켜야 될 것이다. 그러자면 한지의 특징인 영구보존성을 필요로 하는 개인이나 기관이 한지의 수요를 창출해야 될 것이다. 입법-행정-사법부의 기록보관소가 거기에 앞장서주었으면 싶다. 영국의 권위지 '더 타임스'지는 매일 1백부씩 아무리 오래 두어도 절대 빛깔이 누렇게 바래지 않는 '로열판'을 특수지에 인쇄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대통령 표창장, 고급공무원의 인사사령장, 학위수여증 등도 한지의 잠재 적인 수요의 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기의 작품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한국화 동양화의 그 많은 화가들이 좀더 한지에 대해서, 좀더 한지의 질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준다면…. 그럼으로써 한지 수요가 확산된다면 우리 겨레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한지의 소생이 불가능한 꿈만은 결코 아닐 듯 싶다.
참고문헌 및 인터넷 자료 ----------------------------------------------------------------
http://www.netsgo.com/basic/teuksan/4/index.htm
http://www.papermuseum.co.kr
조선일보 2000년 5월 25일자 문화·생활 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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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3.10.02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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