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여순사건의 배경 - 전남 동부지방의 시대적 상황과 여순사건의 배경
2. 여순사건의 전개과정
Ⅲ. 결 론
1. 우익에서 바라본 여순 반란사건의 의의
2. 좌익에서 바라본 여순 반란사건의 의의
※ 여순사건을 보는 여러 가지 시각
Ⅱ. 본 론
1. 여순사건의 배경 - 전남 동부지방의 시대적 상황과 여순사건의 배경
2. 여순사건의 전개과정
Ⅲ. 결 론
1. 우익에서 바라본 여순 반란사건의 의의
2. 좌익에서 바라본 여순 반란사건의 의의
※ 여순사건을 보는 여러 가지 시각
본문내용
수 있다. 14연대의 지휘부는 숙군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말썽의 소지가 많은 좌익계 사병들을 제주도에 파견시키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정은 좌익계 사병의 반발로 이어졌을 것이며, 사병조직을 관할하는 좌익계 하사관들이 자구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반란으로 치닫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무렵 박진경 중령의 피살사건을 계기로 광주 5여단 예하의 부대들은 숙군작업에 휘말려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14연대 내부의 좌익계 장교와 사병들은 불안한 상태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제주파병 명령이 내려지자,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좌익계 하사관들이 좌익토착세력과 연계하여 봉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14연대 내의 좌익계 사병들은 동족상잔을 할 수 없다는 자주적 입장과 숙군작업의 진행됨으로써 자신들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반란을 도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한편, 초기의 보수적 시각에서 이루어진 연구에서는 남로당
)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新民黨) 및 조선인민당(人民黨)이 합동하여 창당되었다. 일제강점기 1925년 조선공산당을 결성한 공산주의자들은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20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고, 북한에는 같은 해 10월 북조선분국을 두었다. 당시 남한에는 여러 좌익 정당들이 있었는데, 남한에서의 기습적인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신탁통치 지지 표명, 더구나 정판사사건(精版社事件) 이후 공산당의 활동은 거의 정지 상태에 있었으므로, 남한에서의 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좌익계이면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닌 일부 지식층이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자, 좌익계 단체들은 남조선노동당과 근로인민당으로 양분되었다. 남조선노동당은 합법적으로 남한의 공산화공작을 계속하였고,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민족분열을 꾀하였다. 1946년 8월 29일 북한에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으며, 1950년 4월 남북의 노동당이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됨으로써, 남조선노동당은 김일성 지배하에 들어갔다. 북한으로 간 남조선노동당 계열은 그 지도자와 함께 1955년 말까지 온갖 명목으로 숙청 또는 처형되었다.
이 깊숙히 관련되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러한 입장의 변화는 진보적이거나 중립적인 시각의 연구성과를 받아들인 때문으로 생각된다. 다만, 남로당 지도부와 도당은 여순사건을 ‘당의 거사’로 사후승인 하였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은 여순사건 당시에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휴전 후에는 남로당계 숙청의 명분으로 이용하는 등 모순적인 행동을 취하였으며, 소련과는 거의 관련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순사건의 배경과 원인 등을 둘러싸고 연구자 간에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최근들어 다양한 자료가 지속적으로 공개 내지 발굴되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는 데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한편, 초기의 보수적 시각에서 이루어진 연구에서는 남로당
)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新民黨) 및 조선인민당(人民黨)이 합동하여 창당되었다. 일제강점기 1925년 조선공산당을 결성한 공산주의자들은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20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고, 북한에는 같은 해 10월 북조선분국을 두었다. 당시 남한에는 여러 좌익 정당들이 있었는데, 남한에서의 기습적인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신탁통치 지지 표명, 더구나 정판사사건(精版社事件) 이후 공산당의 활동은 거의 정지 상태에 있었으므로, 남한에서의 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좌익계이면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닌 일부 지식층이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자, 좌익계 단체들은 남조선노동당과 근로인민당으로 양분되었다. 남조선노동당은 합법적으로 남한의 공산화공작을 계속하였고,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민족분열을 꾀하였다. 1946년 8월 29일 북한에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으며, 1950년 4월 남북의 노동당이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됨으로써, 남조선노동당은 김일성 지배하에 들어갔다. 북한으로 간 남조선노동당 계열은 그 지도자와 함께 1955년 말까지 온갖 명목으로 숙청 또는 처형되었다.
이 깊숙히 관련되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러한 입장의 변화는 진보적이거나 중립적인 시각의 연구성과를 받아들인 때문으로 생각된다. 다만, 남로당 지도부와 도당은 여순사건을 ‘당의 거사’로 사후승인 하였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은 여순사건 당시에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휴전 후에는 남로당계 숙청의 명분으로 이용하는 등 모순적인 행동을 취하였으며, 소련과는 거의 관련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순사건의 배경과 원인 등을 둘러싸고 연구자 간에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최근들어 다양한 자료가 지속적으로 공개 내지 발굴되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는 데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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