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운동-메이지유신(개혁운동의예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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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3. 결론

4. 참고 - 1만엔권속의 인물 - 후쿠자와 유키치

본문내용

오는 말이다. 이 책은 17편까지 출간되었는데 초판만으로도 25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1875년에 출판한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槪略)에서는 서양의 근대문명을 칭송하고, 일본의 독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서양을 배워 근대국가로 나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여 일본의 문명개화를 주도한 개몽사상가로 자유민권 사상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자국민의 민권에 대해서는 자유주의를 부르짖었으나, 이면에는 철저한 국수주의자로서 아시아인의 민권을 멸시하고 국가 권력의 확장에 앞장섰다. 그래서 조선의 친일정객을 비호하고 사주하여 조선의 내정을 조종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1884년 12월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해 오자 김옥균을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하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면서 대부 역할을 했다. 특히 김옥균이 암살당하자 사신의 측근인 고가 네이(小金井權三郞) 중의원 의원을 서울로 보내 처자를 위문할 정도로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편 1885년 3월에는 자신이 경영하는 신문 시사신보에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하여 조선과 중국을 매도하고, 소위 脫亞入毆라 하여 아시아를 버리고 유럽국가와 교류하자고 역설했다. 청일전쟁을 앞두고 개전론과 부전론으로 양분되었을 때 정부의 침략정책을 앞장서서 지지하는 등 대륙침략을 강력히 주장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권을 존중한 합리주의자로서 일본에 서양문화를 소개한 장본인이지만, 다른 나라의 민권은 무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자신은 언제나 와후쿠(和服)라는 전통적인 일본식 옷을 고집했기 때문에 양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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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03.11.02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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