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우서
2. 택리지
3. 동국지도
2. 택리지
3. 동국지도
본문내용
우리나라 국토의 원형을 사실에 가깝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동국지도》에서 확립된 국토의 모습은 약간의 수정은 가해지지만 일제에 의한 근대적 측량지도가 나오기 이전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동국지도》는 이후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 등 후손과 다른 지도제작자들에 의해 수정, 보완되면서 조선후기 지도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34년 제작된 김정호의 《청구도 靑邱圖》도 바로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되었던 전도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지도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는 그의 《청구도》를 바탕으로 보완·발전시킨 것인데 이 역시 그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면 정상기의 《동국지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한말 일본을 통해 근대식 지도제작의 기법이 서서히 도입될 때에도 정상기의 지도는 여전히 정부에 의해 제작되는 각종 전도의 기본도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동국지도》가 조선후기 지도사(地圖史)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 참고문헌
이 찬 <韓國의 古地圖>, 범우사, 199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실학의 학파
○ 경세치용학파
조선 후기 토지개혁과 농민의 생활 안정을 주장하였던 실학파.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에 대응되는 학파로,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익(李瀷)·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 등을 들 수 있다. 모든 개혁의 기초를 토지제도에 두고 유교의 원전과 고제(古制)를 연구·재해석하여 유형원의 균전론, 정약용의 여전론과 같이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었다. 이와 같은 토지개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정치개편 및 정치 참여층의 확대가 필요하므로 이를 위해 관료제, 교육·행정제도 등을 새로 구상하고 신분차별 등 각종 폐단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실제적인 것에서 사실을 발견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강조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제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수학·천문학·지리학 등 다양한 학문 연구가 뒤따랐다.
○ 이용후생학파
18세기 후반에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北學派) 실학자들로 대표되는 학파로, 이용후생의 정치 이론은 청나라의 절동학파(浙東學派)에서 주장한 경세치용(經世致用)에 고무되어 일어난 북학파에 의하여 체계 있는 이론으로 연구되었다. 북학파란 존주대의니 존화양이니 하는 명분론에서 벗어나서 우리보다 앞선 청나라의 문물과 학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정덕 이후에 이용·후생이 있다는 전통적 학설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이용·후생, 곧 경제가 넉넉해야 윤리도 있게 된다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들 이용후생학파(북학파)는 성리학(性理學)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자연과학의 도입, 중소상공업의 육성, 기술혁신 해외 통상 증진 등 국민의 경제를 향상할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이른바 실학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 실사구시학파
각주 9) 참조
《동국지도》는 이후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 등 후손과 다른 지도제작자들에 의해 수정, 보완되면서 조선후기 지도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34년 제작된 김정호의 《청구도 靑邱圖》도 바로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되었던 전도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지도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 는 그의 《청구도》를 바탕으로 보완·발전시킨 것인데 이 역시 그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면 정상기의 《동국지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한말 일본을 통해 근대식 지도제작의 기법이 서서히 도입될 때에도 정상기의 지도는 여전히 정부에 의해 제작되는 각종 전도의 기본도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동국지도》가 조선후기 지도사(地圖史)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 참고문헌
이 찬 <韓國의 古地圖>, 범우사, 199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실학의 학파
○ 경세치용학파
조선 후기 토지개혁과 농민의 생활 안정을 주장하였던 실학파.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에 대응되는 학파로,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익(李瀷)·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 등을 들 수 있다. 모든 개혁의 기초를 토지제도에 두고 유교의 원전과 고제(古制)를 연구·재해석하여 유형원의 균전론, 정약용의 여전론과 같이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었다. 이와 같은 토지개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정치개편 및 정치 참여층의 확대가 필요하므로 이를 위해 관료제, 교육·행정제도 등을 새로 구상하고 신분차별 등 각종 폐단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실제적인 것에서 사실을 발견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강조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제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수학·천문학·지리학 등 다양한 학문 연구가 뒤따랐다.
○ 이용후생학파
18세기 후반에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北學派) 실학자들로 대표되는 학파로, 이용후생의 정치 이론은 청나라의 절동학파(浙東學派)에서 주장한 경세치용(經世致用)에 고무되어 일어난 북학파에 의하여 체계 있는 이론으로 연구되었다. 북학파란 존주대의니 존화양이니 하는 명분론에서 벗어나서 우리보다 앞선 청나라의 문물과 학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정덕 이후에 이용·후생이 있다는 전통적 학설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이용·후생, 곧 경제가 넉넉해야 윤리도 있게 된다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이들 이용후생학파(북학파)는 성리학(性理學)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자연과학의 도입, 중소상공업의 육성, 기술혁신 해외 통상 증진 등 국민의 경제를 향상할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이른바 실학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 실사구시학파
각주 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