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사대부의 예술과 사상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서론

2. 김수증의 곡운구곡과 화음동정사 경영
가. 송시열과 노론계를 중심으로 본 시대적 상황
나. 농수정사와 곡운구곡경영
다. 화음동정사 구조와 은둔철학
1) 구조
2) 초월의 철학

3. 맺는 말

본문내용

잠시 放翁의 시를 생각해 보건대 옳 기는 하다. 그러나 잠든다고 해서 모두 알지 못하게되는 것은 아니다. 잠들어 알지 못함은 오로지 마음이 잠든 뒤라야 할 수 있다. 다만 마음이 잠들지 못하고 눈만 감고 잔다면, 그 꿈은 장차 어 지러워 王侯가 나타나고, 將相이 나타나고, 말달려 사냥하는 것과 聲色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오 또 貧賤, 憂苦, 死喪, 得失의 근심이 있을 것이다. 이는 비록 잠들었다고 하나 만나는 것마다 얽매 임이 되어 급히 다투면서 나아가니 어찌 깨어있음과 다르겠는가. 이제 다시금 希夷를 말하자면 五 代의 戰亂을 당하여 듣고 보는 것은 당대의 근심과 불쌍한 것이었으므로 책을 싸들고 산으로 다 시 들어가 숨어 오래 되었는데, 3년을 자고 난 뒤에야 드디어 다시 나귀를 타고 산을 나오다 宋太 祖가 등극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 말에서 떨어져 산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은 또 무엇 때문 이 었겠 는가. 이 뜻은 오히려 마음 마저 잠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평생토록 功臣으로 雲臺閣에서 자랑거리가 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中原에서 사슴을 쫓는 꿈을 꾸지 않을까? 이것을 아직도 不知라 할 수 있을까?
지금 선생께서는 비록 스스로 希夷의 행적에 의탁하면서도 같지 않은 바가 있으니, 이제부터 산속 에 살게 되면 허다한 세월을 보낼 것이고 그러면 하루도 隱 에 기대어 코골지 않는 날이 아님이 없을 것이므로 그 마음 사이가 오로지 沖漠冥寂하며 無思無夢하여, 사물이 그 한가로움에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을 것이고, 귀신도 그 틈을 엿보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아야 비로서 마음이 잠 들었다 할 수 있고, 이와 같아야 不知라 함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이는 곧 선생의 뜻이 이에 그 치지 않고 바야흐로 太初之谷을 열어 이에 五無之菴을 짓고 屈原의 遠遊曲을 노래하면서 그 壽를 다할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장차 선생은 形骸를 벗어버리고 鴻 을 뛰어넘어 만물 위에 홀로 우뚝 서서, 꿈을 꾸는 것과 꿈에서 깨는 경지와, 알고 모르는 상태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소자가 어찌 가늠 할 수 있는 境地이겠는가. 아! 깊구나, 멀구나. ! "
김수증이 극복해야 할 심적 갈등의 해소방법은 김창협의 '不知'를 통한 마음까지 잠듬(睡心)과 초감각의 문제만이 아니었고, 화음동정사의 핵심적 구조 속에 나타난 소강절의 '反觀' 철학이었다. 그것은 소강절의 우주만물의 이치를 달관한, 先天學으로 觀物思想에 기초한 '心法'에 있었다.
) 小笠智章, 「邵雍と張載の思想における神の意義」, 京都大學中國哲學硏究室,
『中國思想史硏究』,第8號, 1985, 62-67 쪽
김수증은 자신의 천성이 원래 靜함을 얻지 못하다 늘그막에 화를 당하고 입산하고서야 마음과 눈이 병들어 책을 포기하고서, 계절 따라 산수에 노닐면서 정신의 피로를 잊었는데, 두 정자 이후 옛 성현들의 動靜에 관한 이론이 많았으나 다 배우지 못하다, 제갈량과 김시습의 풍격을 마음으로 새기고, 人文石圖象에서 자연과 인간의 이치를 살피며 잠시 소강절의 先天之學을 우러러봄으로서 흔들리지 않는 맑고 고요한 경지에 도달했음을 말한다.
) 金壽增, 『谷雲集』,「無名窩記事」,
尤菴이 1689년 6월 8일 기사사화로 정읍에서 사약을 받기 4개월 전, 2월 25일 제주에 머무를 때 일을 제자 朴光一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선생은 측근에 朱子大全, 朱子語類, 伊川擊壤集, 兩先生往復書등의 책을 쌓아놓고 사색에 잠 기기를 마지 않으셨는데, 항상(소강절)의 '擊壤集'을 주로 보시고 그 나머지는 마음 내키는 대로 보셨다. 길을 가실 적에도 격양집 한 권은 언제나 손에서 놓지 않았다"
3. 맺는 말
김수증은 우리 나라 유가은둔사에서 특별한 위치와 성격을 보여준 사대부이다. 그는 조부 김상헌으로부터 난세를 살아가면서도 정치 현실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가문의 종손으로 정치보다는 修己, 齊家와 奉祀에 관심을 둘 것을 훈육 받았다. 실제로 그는 13세 때 병자호란을 당하고서 선조의 神主를 받들고 춘천을 거처 고향 안동으로 피난을 갔던 일을 자세히 후에 기록하였다. 그가 살아야 했던 17세기는 외세의 침략과 사화의 연속이었으며 季弟 김수항이 기사사화를 당하여 송시열과 함께 사약을 받고 仲弟 김수흥도 유배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新安東金門 출신의 김상용과 김상헌은 胡亂을 극복하는 국가적 수난을 통해 절의를 지킨 우국충신이 되어 서인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이 존숭하여 온 건국초의 고려유신 정몽주를 이어 훗날 李恒老로 이어지는 義理之學의 동간이 되었다.
명말 西學의 전파와 청조건국으로 인한 中原에서부터 충격파를 이룬 華夷觀의 변화는 조선 선비들에게 기존의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과 국제 질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요청되었으나 왕권과 문치의 균형을 이루려는 士林들의 이상주의는 자신들의 명분분열로 때로 최고 통치자인 왕들의 개인적 성향과 정치술수에 따라 그들의 생명을 의리와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문화권 지식인의 역사는 시초부터 난세와 치세를 살아간 은사들의 얘기를 면면히 전수하였고 이것은 여타 문명권과는 구별되는, 사회와 자연에 대한 생활철학과 관습 그리고 은둔문화를 낳았다.
김수증은 사화로 죽은 김수항의 아들이며 자신의 조카인 김창흡과 함께 전 생애를 거처 사대부의 신분을 지켜야 하면서도 물외에 방랑하는 처사적 태도를 보여, 젊어서는 遊記文學을 창작하고 노년에는 뼈아픈 가문의 고통을 소강절의 선천사상을 통한 달관, 陸放翁의 不知, 주자의 平生山水心 그리고 제갈량과 김시습의 절의를 끌어들이고, 금강산에서 선승들을 데려다 遊山의 체험을 공유하는 등(伴睡庵) 인간적 고뇌를 치유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면한 여러 가지 사업에 몰두하는 가운데에서 평상심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별히 화악산 북록에 지은 화음동정사에 반영된 조형적 상징과 사상을 통하여 천인합일의 섭리를 표현하므로써 유가와 도가의 은둔철학을 종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은둔방식과 철학에서는 조선조 17세기 지배층이었던 사대부들의 중국 전래의 고급 은사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그 시대 정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고상한 논리와 심미적 수준을 보여주는 지식인들의 유희적 경향도 보인다.
  • 가격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3.11.19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346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