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 말
2. 공립의원 제중원(濟衆院)에서의 간호
1) 제중원의 탄생과 운영
2) 제중원에서의 간호
3. 1895년 콜레라 유행과 간호
1) 인천, 평양, 의주의 피병원 설치 계획
2) 한성의 피병원과 간호
4. 내부병원(광제원, 廣濟院)과 간호
1) 내부병원(광제원)의 창설과 운영
2) 광제원의 변화와 일본인 간호부의 등장
5. 대한국적십자사(병원)에서의 간호
1) 대한국적십자사(병원)의 창설
2) 대한국적십자사(병원)의 운영과 간호
6. 대한의원에서의 간호
1) 대한의원의 창설과 운영
2) 대한의원에서의 간호
3) 대한의원의 간호부, 산파 양성
7. 맺는 말
2. 공립의원 제중원(濟衆院)에서의 간호
1) 제중원의 탄생과 운영
2) 제중원에서의 간호
3. 1895년 콜레라 유행과 간호
1) 인천, 평양, 의주의 피병원 설치 계획
2) 한성의 피병원과 간호
4. 내부병원(광제원, 廣濟院)과 간호
1) 내부병원(광제원)의 창설과 운영
2) 광제원의 변화와 일본인 간호부의 등장
5. 대한국적십자사(병원)에서의 간호
1) 대한국적십자사(병원)의 창설
2) 대한국적십자사(병원)의 운영과 간호
6. 대한의원에서의 간호
1) 대한의원의 창설과 운영
2) 대한의원에서의 간호
3) 대한의원의 간호부, 산파 양성
7. 맺는 말
본문내용
추가되었다.
이렇게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에서는 산파과와 간호부과를 분리하여 모집하였고, 입학시험을 통하여 학생을 선발하였으며, 교과목도 수학, 해부학, 생리학 등의 기초과학 분야와 전문 분야를 골고루 포함시켰다. 이는 근대적 교육 기회가 여전히 제한되어 있던 당시 우리나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드물고도 수준높은 교육제도였다.
이렇게 교육에 관한 세부사항을 규정한 뒤 이루어진 1910년의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학생 모집은 의학과 제1학년과 약학과 제1학년, 그리고 아래의 신문기사에서 확인되듯이 간호부과를 대상으로 하였다.
대한의원에서는 간호부 10명을 모집한다는데 모집기한은 본월 15일 내로 정하고 연령은 18세로부터 30세까지로 하고 시험은 신체검사, 편가명교용(片假名交用)한 한문독서, 수학은 가감승제라더라.
그러나 1910년의 간호부과 모집생 역시 정식으로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합병되자 학교도 명칭이 바뀌는 등 수난의 역사를 맞게 되었다.
7. 맺는 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병원인 공립의원 제중원은 1885년 설립부터 1894년 선교회로 넘겨질 때까지 조선 정부가 재정과 인사를 담당하고, 미국인 선교의사가 의료를 담당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소규모 종합병원의 면모로 출발한 제중원은 간호를 담당할 인력을 따로 두지 않은 대신 생도가 약의 조제와 투여, 간호, 의사의 지시 등을 수행하도록 규정하였다. 미리 예상치 못했던 문제는 여성 의료인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는데, 그것은 조선의 전통적인 내외법(內外法)에 따라 남성 의사가 여성을 진료하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기(官妓) 중에서 5명의 소녀를 선발하여 제중원에서 일하도록 하여 이들이 석달 남짓 제중원 안에서 여성 의료인과 기생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곧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 제중원의 여성 진료는 미국인 간호사와 여의사가 담당하였다. 그 가운데 간호사 엘러스는 자신의 전문인 간호보다 여성 진료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렇듯 제중원은 간호가 전문화되지 않은 채 운영되었다.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자 조선 정부는 근대적 방역책과 피병원 건립을 계획하였다. 초기에 계획된 지방의 피병원에서 일반 한국인 남성이 간호부(看護夫)로 일할 예정이었지만, 이 피병원은 설립되지 못하였다. 그 뒤 콜레라가 한성에까지 번지자 정부가 설립한 피병원과 서양선교의사들의 피병원에서는 서양선교간호사, 서양선교사들과 함께 한국인 남녀가 신분을 넘어서 간호활동을 펼쳤다.
국가 병원을 직접 운영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에 따라 1899년 내부병원(광제원)이 개설되었다. 이 병원은 활인서의 부활로 이해되었으며 한의술을 위주로 하는 구호병원의 성격을 띠었다. 광제원은 외래환자에게 약을 주는 것을 주업무로 하여 입원 시설이 없는 대신 전염병환자를 위한 피병원을 설치하였다. 피병원에서의 간호는 주로 환자의 친족 등이 담당하였다. 1905년부터 광제원은 서양근대의술을 펼치는 기관으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특히 통감부가 설치된 뒤 한의사들이 쫓겨나고 일본인 의사가 진료를 장악하면서 진료과가 분과되었으며 수술과 입원 업무도 시작되었다. 이렇게 광제원이 변모하면서 적은 수의 일본인 간호부가 그곳에서 간호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1905년 창설된 대한국적십자사병원은 대내적으로는 기존의 대민구료를 잇고 대외적으로는 우리 정부가 보편적인 적십자 정신을 수용한다는 성격을 띠었다. 전장(戰場)에서 간호의 중요함과 나이팅게일의 업적을 설립 근거로 삼은 대한국적십자사병원은 정부 병원으로는 최초로 간호를 전문화하여 간호부장 1인과 간호부 5인을 의원 3인, 약제사 1인, 약국조수 3인 등과 함께 일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간호졸감원(看護卒監員) 1인과 간호부감원(看護婦監員) 1인이 임명되었으며, 더욱이 이들은 모두 한국인 남성으로 정규 간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당시 간호의 전문화는 시작되었으나 전문직화는 되지 못한 상태였다.
1907년 광제원, 의학교와 그 부속병원, 적십자사병원을 통합하여 설립된 대한의원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보건의료기구였다. 전문화된 8개 병동을 갖춘 대한의원에는 처음부터 일본인 간호부와 산파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했거나 시험을 통하여 자격을 얻었거나 견습간호부였다. 1908년에는 '조선득업 간호부회'가 결성되었으며, 한국인 간호부도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간호인력은 1909년 산파 10명, 간호부 50명에 이르러 의원, 약제사를 포함한 전체 의료인의 69%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간호부장을 책임자로 하는 간호직제, 급여체계, 행동수칙과 근무체계, 그리고 간호부 기숙사 등이 갖추어졌다. 또한 대한의원 교육부에서 의사, 약제사와 함께 산파와 간호부를 양성하도록 하여 1908년부터 한국인 여성이 간호부견습생이 되었다. 1909년 부속의학교가 설립되면서 4년제 의학과, 3년제 약학과와 더불어 2년제 산파과와 간호부과가 설치되었다. 이때 산파과 입학생은 관비생 10명, 사비생 10명, 간호부과 입학생은 관비생 20명으로 정해졌다. 또한 산파과와 간호부과의 학기, 입학, 퇴학, 징계, 출학, 시험과 졸업, 학비와 의무복무, 학과 등이 규정되어 간호교육이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대한의원은 일정한 자격을 갖춘 간호인력을 고용하는 한편 정규 간호학교를 세워 근대적 간호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즉 이때 비로소 간호와 간호직의 전문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통감부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직원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구성된 대한의원의 간호는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의 요구와 이해관계에 따른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1885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병원인 제중원에서 일제강점 직전의 대한의원에 이르기까지 25년 동안 정부 병원 안에서 간호는 점차 전문화를 이루고 전문직의 특징을 갖추는 등 근대적인 모습을 띠어 갔다. 이것은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서양에서의 간호 근대화 과정과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 과정에서 식민지가 됨으로써 이 시기 우리나라의 간호는 서양의 간호와는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에서는 산파과와 간호부과를 분리하여 모집하였고, 입학시험을 통하여 학생을 선발하였으며, 교과목도 수학, 해부학, 생리학 등의 기초과학 분야와 전문 분야를 골고루 포함시켰다. 이는 근대적 교육 기회가 여전히 제한되어 있던 당시 우리나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드물고도 수준높은 교육제도였다.
이렇게 교육에 관한 세부사항을 규정한 뒤 이루어진 1910년의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학생 모집은 의학과 제1학년과 약학과 제1학년, 그리고 아래의 신문기사에서 확인되듯이 간호부과를 대상으로 하였다.
대한의원에서는 간호부 10명을 모집한다는데 모집기한은 본월 15일 내로 정하고 연령은 18세로부터 30세까지로 하고 시험은 신체검사, 편가명교용(片假名交用)한 한문독서, 수학은 가감승제라더라.
그러나 1910년의 간호부과 모집생 역시 정식으로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합병되자 학교도 명칭이 바뀌는 등 수난의 역사를 맞게 되었다.
7. 맺는 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병원인 공립의원 제중원은 1885년 설립부터 1894년 선교회로 넘겨질 때까지 조선 정부가 재정과 인사를 담당하고, 미국인 선교의사가 의료를 담당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소규모 종합병원의 면모로 출발한 제중원은 간호를 담당할 인력을 따로 두지 않은 대신 생도가 약의 조제와 투여, 간호, 의사의 지시 등을 수행하도록 규정하였다. 미리 예상치 못했던 문제는 여성 의료인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는데, 그것은 조선의 전통적인 내외법(內外法)에 따라 남성 의사가 여성을 진료하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기(官妓) 중에서 5명의 소녀를 선발하여 제중원에서 일하도록 하여 이들이 석달 남짓 제중원 안에서 여성 의료인과 기생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곧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 제중원의 여성 진료는 미국인 간호사와 여의사가 담당하였다. 그 가운데 간호사 엘러스는 자신의 전문인 간호보다 여성 진료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렇듯 제중원은 간호가 전문화되지 않은 채 운영되었다.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자 조선 정부는 근대적 방역책과 피병원 건립을 계획하였다. 초기에 계획된 지방의 피병원에서 일반 한국인 남성이 간호부(看護夫)로 일할 예정이었지만, 이 피병원은 설립되지 못하였다. 그 뒤 콜레라가 한성에까지 번지자 정부가 설립한 피병원과 서양선교의사들의 피병원에서는 서양선교간호사, 서양선교사들과 함께 한국인 남녀가 신분을 넘어서 간호활동을 펼쳤다.
국가 병원을 직접 운영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에 따라 1899년 내부병원(광제원)이 개설되었다. 이 병원은 활인서의 부활로 이해되었으며 한의술을 위주로 하는 구호병원의 성격을 띠었다. 광제원은 외래환자에게 약을 주는 것을 주업무로 하여 입원 시설이 없는 대신 전염병환자를 위한 피병원을 설치하였다. 피병원에서의 간호는 주로 환자의 친족 등이 담당하였다. 1905년부터 광제원은 서양근대의술을 펼치는 기관으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특히 통감부가 설치된 뒤 한의사들이 쫓겨나고 일본인 의사가 진료를 장악하면서 진료과가 분과되었으며 수술과 입원 업무도 시작되었다. 이렇게 광제원이 변모하면서 적은 수의 일본인 간호부가 그곳에서 간호 업무를 보기 시작하였다.
1905년 창설된 대한국적십자사병원은 대내적으로는 기존의 대민구료를 잇고 대외적으로는 우리 정부가 보편적인 적십자 정신을 수용한다는 성격을 띠었다. 전장(戰場)에서 간호의 중요함과 나이팅게일의 업적을 설립 근거로 삼은 대한국적십자사병원은 정부 병원으로는 최초로 간호를 전문화하여 간호부장 1인과 간호부 5인을 의원 3인, 약제사 1인, 약국조수 3인 등과 함께 일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간호졸감원(看護卒監員) 1인과 간호부감원(看護婦監員) 1인이 임명되었으며, 더욱이 이들은 모두 한국인 남성으로 정규 간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당시 간호의 전문화는 시작되었으나 전문직화는 되지 못한 상태였다.
1907년 광제원, 의학교와 그 부속병원, 적십자사병원을 통합하여 설립된 대한의원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보건의료기구였다. 전문화된 8개 병동을 갖춘 대한의원에는 처음부터 일본인 간호부와 산파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했거나 시험을 통하여 자격을 얻었거나 견습간호부였다. 1908년에는 '조선득업 간호부회'가 결성되었으며, 한국인 간호부도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간호인력은 1909년 산파 10명, 간호부 50명에 이르러 의원, 약제사를 포함한 전체 의료인의 69%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간호부장을 책임자로 하는 간호직제, 급여체계, 행동수칙과 근무체계, 그리고 간호부 기숙사 등이 갖추어졌다. 또한 대한의원 교육부에서 의사, 약제사와 함께 산파와 간호부를 양성하도록 하여 1908년부터 한국인 여성이 간호부견습생이 되었다. 1909년 부속의학교가 설립되면서 4년제 의학과, 3년제 약학과와 더불어 2년제 산파과와 간호부과가 설치되었다. 이때 산파과 입학생은 관비생 10명, 사비생 10명, 간호부과 입학생은 관비생 20명으로 정해졌다. 또한 산파과와 간호부과의 학기, 입학, 퇴학, 징계, 출학, 시험과 졸업, 학비와 의무복무, 학과 등이 규정되어 간호교육이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대한의원은 일정한 자격을 갖춘 간호인력을 고용하는 한편 정규 간호학교를 세워 근대적 간호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즉 이때 비로소 간호와 간호직의 전문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통감부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직원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구성된 대한의원의 간호는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의 요구와 이해관계에 따른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1885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병원인 제중원에서 일제강점 직전의 대한의원에 이르기까지 25년 동안 정부 병원 안에서 간호는 점차 전문화를 이루고 전문직의 특징을 갖추는 등 근대적인 모습을 띠어 갔다. 이것은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서양에서의 간호 근대화 과정과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 과정에서 식민지가 됨으로써 이 시기 우리나라의 간호는 서양의 간호와는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