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음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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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일음악에 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바그너·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헨델·

·바흐·

·베버·

·슈트라우스·

본문내용

전주곡》과 같은 오르간작품이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를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한편 그는 교회칸타타를 거의 매달 한 곡씩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궁정악단의 연주를 통해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악파의 음악을 알게 되었다. 바흐는 이탈리아의 협주양식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에도 착안, 비발디의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로 편곡하였다. 이것이 훗날 협주곡의 명작을 낳는 기초가 되었다. 17년 말, 그때까지 궁정의 집안싸움에 휘말리기도 하고, 또 희망하고 있던 궁정악장의 지위도 얻지 못하자, 바이마르궁정악단에 실증을 느끼게 된 바흐는 괴텐으로 이사하였다. 괴텐궁정악단의 지위는 새바람을 찾고 있던 바흐에게 가장 조건이 좋은 것이었으며, 그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17인으로 구성된 궁정악단을 이끌어 가면서 자유롭게 작곡과 연주에 열중하였다. 좋은 환경과 풍족한 생활 속에서 창작에 대한 의욕이 높아진 그는 잇달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기악곡, 3개의 《바이올린협주곡》, 6곡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의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등은 이 시기에 작곡된 것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밝은 빛으로 충만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흐의 사회적 ·가정적인 행복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20년에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자, 이듬해 35세의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새로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위하여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곡집》 (《프랑스모음곡》도 포함)을, 그리고 장남 프리데만을 위하여 《인벤션》을 작곡하였으며,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도 이 시기에 정리된 것이다.
17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의 칸토르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27년간을 교회음악가로 보내게 된다. 그의 임무는 기악과 성악의 개인지도와 합창단의 훈련, 그리고 이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성토마스교회와 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금요일에는 수난곡이 불려졌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이로다》 등을 포함한 140곡 이상의 교회칸타타, 《마태오수난곡》을 포함한 몇 곡의 수난곡, 《마니피카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나단조미사》 등 많은 교회음악이 작곡되었다. 이 라이프치히시기를 ‘교회음악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옳지만, 사실상 그는 이 때 대학생의 연주단체를 위해 많은 세속적인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도 작곡하였고, 만년에는 대위법작법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골트베르크변주곡》《음악의 헌정》《푸가의 기법》 등도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 최후의 《푸가의 기법》은 급속히 쇠약해진 시력과 뇌졸중의 발작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결국 실명한 그는 7월 28일 오후, 복용해 온 약의 해독으로 급격한 전신 허약증세를 일으켜 별세, 성 요한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작품】 바흐는 대략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음악의 총괄자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북독일의 북스테후데와 남독일의 파헬벨의 오르간음악의 작법을 습득하였다. 다음에 코렐리와 비발디로부터 이탈리아음악의 명쾌한 협주양식과 풍부한 화성, 그리고 라틴적인 형식감을 도입하였으며, 륄리와 쿠프랭에게서 프랑스음악의 섬세한 건반작법과 대담한 프랑스식 서곡을 배웠다. 이러한 당시의 온갖 음악의 전통과 각 국민의 양식이 바흐의 천재적인 개성 속에서 융화되어 긴장도가 높은 독특한 음악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바흐를 전통적인 보수주의자, 여러 양식의 총괄자로서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그의 작풍에는 베토벤이 낭만파를 예견하고, 바그너가 20세기의 음악을 예견한 것과 같이, 훗날 발생한 고전파의 양식을 암시하는 많은 특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베버·
홀슈타인주(州)의 오이틴 출생. 어려서 부친에게 초보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다음, 미하엘 하이든(요제프의 동생)에게 사사하였다. 18세 때 브레슬라우오페라극장의 악장이 되었으나 2년 후 사직하고 유럽 각지를 돌아다녔으며 방랑생활 중에도 그는 오페라를 비롯하여 각종 작품을 썼다. 1813년 프라하의 오페라극장 지휘자가 되어 겨우 방랑생활은 끝났지만 1817년 또다시 드레스덴으로 옮겼다. 이 무렵부터 낭만파음악가로서 그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유명한 《마탄의 사수 Der Freisch犧tz》의 작곡에 착수하여 1820년에 완성, 이듬해 6월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그는 이 오페라의 대성공에 힘입어 다시 《오이리안테 Euryanthe》(1832)를 작곡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결핵이 심해지고 생계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런던의 유명한 코벤트 가든극장으로부터 신작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아 《오베론 Oberon》을 작곡하였으며, 런던으로 가서 이 오페라를 초연(1826)한 후,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베버에게는 기악곡도 많지만 그의 천분은 역시 오페라였으며,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일오페라의 새로운 낭만파적인 단계를 개척하였다. 작품으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트슈튀크 Konzertst犧ck》 이외에도 대중적인 것으로 《무도에의 권유 Aufforderung zum Tanz》가 특히 유명하다
·슈트라우스·
빈 출생. '왈츠의 아버지'로 불리며,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는 그의 아들이다.
맥주홀과 여관을 경영하는 집안에 태어나 제본사에서 일하면서 바이올린을 익혔다.
1823년 J.F.라너의 4중주악단에 들어가 주로 비올라로 왈츠·카드리유 등의 무도곡을 연주하였는데, 이 악단은 1824년 현악오케스트라로 발족하여 슈트라우스는 그 제2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1825년에는 자신의 악단을 조직하여 자작의 무도곡을 주요 레퍼토리로 유럽 각지에서 연주, 이른바 빈왈츠를 전 유럽에 널리 전파하였으며, 1845년에는 빈의 궁정무도회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작품은 왈츠, 카드리유 등의 무도곡이 대부분이며, 그 중에서도 왈츠에서는 서주(序奏)에 이어 5부의 왈츠를 계속하고 코다(coda:結尾)로 끝을 맺는, 리듬에 미묘한 뉘앙스를 지닌 빈왈츠의 형식을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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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12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7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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