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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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푸틴의 신외교정책의 개요

[2] 본론
1. 북-러 관계
2. 한-러 관계
(가) 옐친 대통령 집권기
(나) 푸틴 대통령 집권기
3. 러시아의 대한반도 정책 적극화 배경
(가) 국제법적 배경
(나) 독트린적 배경
(다) 미-러 전략 안보적 배경
(라) 세력균형론적 배경
4. 러, 대한반도 영향력 행사의 의도

[3] 결론

본문내용

히 밝혔다.
북한은 주한 미군 철수가 절박한 문제라고 주장했으며 러시아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북한의 입장에 `이해'를 표명했다.
북한 미사일 개발 북한은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이 본질적으로 평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는 어떤 국가에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며 러시아는 북한의 이 같은 입장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 양국 정상은 1972년 조인된 ABM 협정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자 공격용 전략무기 감축의 근거라는 것을 유의하며 새 세기에도 국제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방법으로 협력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경제, 군사 협력 양국 정상은 정치, 경제, 군사, 과학, 기술, 문화 등 다양한 분양에서 쌍방 협력을 장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에 합의했다.
양측은 현재의 채무문제 해결을 기초로 전력분야 등에서 합작기업을 재건하는 계획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세계안정 새 세기에 러시아와 북한은 세계 안정을 유지하고 모든 구성원들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법과 평등의 원칙, 상호 존중, 상호이익을 위한 협력에 근거한 새롭고 공정한 세계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엔의 역할 양국은 세계 문제에서 유엔이 더욱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며 유엔과 다른 원칙, 국제법의 규범을 부정하려는 어떤 시도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소보사태
신유고연방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과 세르비아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유혈충돌사태를 말한다.
코소보는 알바니아계 주민이 전인구의 80% 가까이를 차지하지만 영토는 신유고연방에 속해 있는 자치주이다. 그래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바라고 있었다. 1998년 3월 초 코소보의 알바니아 분리주의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코소보 사태가 시작되었다.
보스니아내전의 종식으로 한 동안 잠잠하던 발칸반도가 다시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 경찰은 즉각 반격에 나서 반군은 물론, 반군 거점지역의 주민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이에 맞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코소보 해방군(UCK)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1998년 3월 31일 국제연합(UN)은 유고연방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내렸으며, 1998년 4월 세르비아의 탄압에 대한 알바니아계 주민의 시위가 확산되었다. 세르비아는 1998년 5월 3일 대규모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수십 명의 알바니아계 반군을 사살하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인종청소작전을 펼쳤다.
이를 피해 코소보로부터 탈출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러시를 이루었고, 난민수는 1999년 1월 현재 3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6월 코소보 사태에 대한 개입을 선언한 미국과 유럽연합은 NATO 병력을 코소보 주변에 배치하고 코소보로부터의 세르비아 병력의 철수, 잔혹한 인종청소의 중단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이를 무시하고 1998년 8월 코소보 해방군의 주요거점을 함락시켰다. 1998년 10월 나토는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 사용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1999년 2월부터 3월 말까지 몇 차례에 걸쳐 서방측과 코소보 평화협상을 가졌다.
그러나 협상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3월 24일 나토는 유고연방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였다. 6월 3일 마침내 세르비아 의회가 UN의 평화 계획를 승인하였다. 6월 5일부터 나토와 유고연방간에 군사회담이 열렸고, 9일에는 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나토의 유고공습이 시작된 이래 11주간 계속된 코소보 사태는 수습되고 평화안 이행에 들어갔다.
SALT Ⅲ : 제3차 전략무기제한협정.
79년 6월 빈에서 열린 카터-브레즈네프의 SALTⅡ를 주제로 하는 수뇌회담을 앞두고 5월 중순 브레즈네프가 카터 미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어 제3차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제안했다.
SALTⅢ의 주제는 ①MIRVICBM을 500기 이하로 한다(SALTⅡ에서는 820기). ②MIRVSLBM이나 전략폭격기 등 모든 전략핵무기 운반수단의 총수를 1500기(SALTⅡ에서는 2250기)로 제한한다. ③이러한 `명확한 전략무기' 외에 쌍방이 유럽에 증강하고 있는 MRBM(중거리탄도탄) 등 전략무기인지 전술무기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회색무기(灰色武器)' 규제가 협상대상에 올랐다. 거시적으로 보아 SALTⅡ는 확장중인 미·소 핵무기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선에 상한선을 긋고 있는 데 비해 SALTⅢ은 처음으로 `제한'에서 `삭감'으로 방향전환을 한 데 의의가 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문에 카터 대통령은 80년 1월 상원에 SALTⅡ의 비준심의 중지를 요청, SALTⅢ 협상도 중단되었다.
전략무기감축협상(戰略武器減縮協商 START Strategic Arms Reduction Talks) : 미국과 구 소련간의 전략무기 감축에 관한 협상.
종래의 SALT가 제한교섭이었던 것에 대해 START는 적극적인 감축교섭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것이지만 80년 1월에 중지된 SALT Ⅲ 자체가 이미 감축협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START는 폴란드 정세에 영향을 받아 82년 6월에야 비로소 제네바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83년 3월 중단, 6월 재개했으며 91년 7월 부시 미국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당시 미국과 소련이 보유하고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장거리핵무기를 향후 7년에 걸쳐 각각 30%와 38% 감축하기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소련의 붕괴로 한때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됐으나 92년 구 소련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 벨로루시 4개 핵보유국이 협정이행을 위한 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타결됐다.
START는 앞서 체결된 중거리핵전력(INF) 폐기협정과 함께 세계적인 핵위협 제거에 중대한 진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93년 1월엔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2단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Ⅱ)에 서명, 2003년까지 ICBM을 500기 정도로 줄이고, 잠수함발사미사일(SLBM)도 1750기 수준으로 제한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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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23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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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40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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