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모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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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모든것.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김대중 대통령의 모든것

2. 김정일의 모든것

본문내용

침내 전화통에 대고 소리쳤다.
“아버지! 제발 돌아오십시오.”
김정일 총비서가 스타일상 김 주석과 다른 점이라면 표현 방식의 차이를 들수 있을 것이다. 김 주석과 달리 김 총비서는 노기를 표현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 사후 대부분의 평자들은 김정일 정권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점쳤다. 짧으면 3개월, 길어야 3년 안에 붕괴한다는 것이다. 그 유력한 논거 중 하나가 북의 새 지도자 김정일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후계자가 되었을 뿐 아버지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페리 보고서조차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을 공언하는 것을 보면 이같은 문제는 해소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 95∼97년 사이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 총비서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지도력을 입증한 것이다. 그의 정책 결정의 특징 중 하나는 ‘의외성’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의 장지가 금수산기념궁전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현재 금수산기념궁전은 북의 사회 통합의 구심이 되고 있다.
98년 8월 북이 발사한 ‘물체’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 며칠 후 북이 그것을‘인공위성’이라 발표했을 때 세계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문제의 인공위성은 한반도의 정세를 뒤바꾸어 놓았다. 미국에게 북은 ‘붕괴시켜야’ 하거나 ‘변화를 유도해야’ 하는 대상에서 ‘있는 그대로의 체제를 인정해야’ 하는 대상으로 변화했다. 물론 심각한 식량난 속에서 막대한 외화를 들여 인공위성을 개발했어야 하는가라는 비판도 있다. 이에 대해 북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우리에게 그 같은 능력이 없었다면 미국은 우리를 이라크나 유고처럼 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북의 인민들은 김 총비서의 정책적 의외성을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을 해나가는’ 강점으로 인식하지만 서방에서는 ‘예측불가’라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내가 아는 김 총비서는 다양한 방면에 대해 화제가 풍부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이 같은 측면이 성격적 대담성과 맞물려 정책의 ‘의외성’을 빚어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일 총비서는 64년 6월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으로 당사업을 시작했다. 총비서에 이르기까지 37년간의 당 사업에서 그는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업무스타일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것은 ‘한밤중의 전화’다. 나는 북의 여러 고위인사들로부터 이같은 얘기를 들었다. 김 총비서는 “서류를 결재하던 중 의문이 생겨 늦은 시간이지만 부득이 전화했다”며 낮에 올린 결재서류에 대해 보다 자세히 묻곤 한다고 한다.
그가 반드시 묻는 말 중의 하나가 “인민들이 뭐라고 하겠소?”라는 것이다. 그러니 부하들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도 김 총비서 업무스타일의 한 특징이라 한다.“새로 작곡된 음악을 틀어놓고 평가하면서 눈으로는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 한편 전화로는 누군가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 식이다.
김정일 총비서는 서구식 양복을 입지 않는다. 그가 서구식 양복을 입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한 측근 인사는 “화려한 옷차림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라는 말씀이 계셨다”고 했다.가장 좋아하는 꽃이 목화꽃이라는 점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목화꽃은 화려하지 않으나 유용하다.
서방과의 교류가 많지 않은 북의 지도자 김 총비서가 세계적인 추세를 제때에 파악해 나가는 수단은 무엇일까. 김 총비서가 서방의 방송, 영화를 많이 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를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서방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나는 특히 그가 영어를 이해하는 것으로 느꼈다. 그가 구사하는 것은 전통적인 영국식 영어가 아니라 현대 미국어였다.
김일성종합대학에는 ‘김정일 사적관’이 있다. 전국에서 유일한 곳이라 한다. 이 곳에서는 김정일 총비서의 대학시절을 잘 볼 수 있다. 사적관에서 필자는 그가 재학중 쓴 ‘3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할 데 대하여’라는 논문을 특히 관심 깊게 보았다. 핵심내용은 “신라의 3국 통일은 통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동시대 조선반도에 발해라는 다른 주권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신라는 영토를 넓히려는 야심만 있었을 뿐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지향이 없어서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국가를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민족통일은 3국중 통일 지향이 가장 강했던 고구려를 이어 받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적관에는 김정일 학생과 동료들이 군사 강의, 사격훈련, 점호, 야간습격 전투훈련, 군사야영훈련 등을 받고 있는 다양한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적관에 전시된 사진들을 보다 보면 재미난 공통점이 발견된다. 학급 동료들과 함께 찍은 여러장의 사진에서 김정일 학생은 사진의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모습은 항상 맨 뒷줄 한켠에서 발견된다.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던 4월 10일 나는 평양에 있었다. 4일부터 8일까지 계속된 제9차 조일회담 취재차 방북했다가 역사적인 뉴스에 접하게 됐던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김 총비서의 한 측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분단 이후 여러차례 최고위급 회담 성사를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94년에는 수령님의 서거로 최고위급 회담이 무산되었는데 이제 드디어 성사되었으니 우리 민족의 손으로 통일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장군님께서는 지금 회담 준비로 대단히 바쁘다. 그 분의 건강을 지켜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그는 특히 “지난날 조문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며 이번에는 아무런 전제 없이 서로가 일단 부딪혀 보자”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오는 6월 12일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될 남북의 두 정상.그 한 당사자인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나는 30년간의 취재 파일을 바탕으로 지난해 책을 한 권 출간한 바 있다. 나의 눈에는 두 정상의 스타일이 상당히 다르게 비친다. 오는 정상회담에서 이 두 정상의 서로 다른 캐릭터가 어떻게 어우러져 분단 50년의 역사를 청산해 나갈지 기대되는 바가 크다.
자료출처:해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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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2.01
  • 저작시기2004.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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