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한학설의 전개와 쇠퇴과정 - 과학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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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2. 행위자-연결망 모형에 대한 소개

3. 봉한학설의 성쇠에 관한 역사적 사실

4. 봉한학설을 둘러싼 연결망 분석

5. 맺음말

본문내용

해석할 수 있다. 과학에서의 주체성있는 연구가 거둔 기대 이상의 성공은, 거꾸로 주체의 과학성을 입증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적인 것은 보다 '사회주의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 김근배, "북한 봉한학설의 등장과 전개"(앞의 글), 16쪽.
그러나, '주체'라는 사상적 요청에 의해 강화되어 가던 포괄적 연결망은 다른 변수들에 의해 제약을 받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김봉한과 이해관계를 같이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권력층 인사 박금철이 실각하게 되며, 국제적으로는 리셴코주의의 몰락이 또한 봉한학설의 발전을 막는 결과를 불렀다.
리셴코주의는 소련에서 후원자 후르시초프의 사망과 서방에서의 유전학 발달로 인해 1965년부터 파탄을 맞았고, 북한에서도 1966년 말에 리셴코주의를 백지화하고 생물학을 유전학이론에 근거하여 발전시킬 것을 천명하였다.
) 윤명수, ■■조선과학기술발전사(해방후 편1)■■ (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 1994), 240쪽: 김근배, 위의 글, 17쪽.
1960년대까지 리셴코주의는 선천적 유전인자보다 후천적 환경을 더 중시한다는 표방 아래 사회주의권 생물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부르주아 생물학'에 맞서는 리셴코주의 생물학의 존재는, 기존의 (영미)생물학과 상충되는 부분을 포함한 봉한학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파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리셴코주의의 몰락은 봉한학설의 진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환경요인의 절대성을 내세우는 '사회주의 생물학' 대신에 유전자와 DNA의 역할을 중시하는 서방이 유전학이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에서도 공식화됨으로써, 점점 세계적으로 주도권을 잡아가던 DNA 유전학 진영의 공세로부터 봉한학설을 지켜줄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1950년대 중반에 권력층의 일원으로 부상한 박금철이 자신의 딸을 김봉한의 연구에 참여시킨 것이 인연이 되어 봉한학설이 강력한 지원을 획득했는데, 1967년 박금철이 숙청됨에 따라 김봉한도 몰락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공동철, ■■김봉한■■ (학민사, 1992). 이는 저자가 인터뷰한 김만철의 증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신빙성을 둘러싼 논란의 여지가 많이 있고, 봉한학설의 공적 영역에서의 삭제가 박금철의 실각보다 앞선다는 점에서 비판
) 김근배, 위의 글, 18쪽.
도 있으나, 여러 요인들과 함께 고려할 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3)연결망의 변화에 따른 주요 사건들의 재분석
이제, 위와 같이 연결망의 변화 추이를 살펴본 것을 토대로 앞서와 같은 2차원 그래프 상에 봉한학설이라는 프로젝트의 추이를 표시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리승기의 비날론 대공업화
②한의학의 제도화
③김봉한의 논문 발표
④경락연구소 설립
⑤'봉한산알' 이론 발표
⑥소련의 리셴코 실각
⑦북한에서 박금철 실각
⑧공적 무대에서 봉한학설의 전면적 삭제
①과 ②에 의해서, 김봉한이 "경락 계통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기 이전에도 이미 포괄적 연결망은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체'라는 가치가 북한 사회에서 비중을 키워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가치를 담지할 수 있는 이론이 출현한다면 어느 정도의 지지는 보장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①), 그 현실적 후보로 체계화의 길에 오른 한의학이 유망해지고 있었던(②) 것이다. 이 때 ③에 의해 '봉한학설'은 화려하게 북한 학계에 등장하게 된다. 이미 포괄적 연결망이 잠재적으로 형성된 상태에서 봉한학설은 많은 지지를 얻고, ④의 경락연구소 설립과 ⑤의 '산알학설' 발표 등을 통해 국소적 연결망도 강화된다. 이때쯤이 봉한학설의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⑤의 '산알학설'은 그 대담함으로 인해 기존 생물학 이론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국소적 연결망이 약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⑥의 사건은 포괄적 연결망과 국소적 연결망을 모두 약화시키는 것이었고, ⑦의 사건은 북한 국내 정치의 측면에서 포괄적 연결망을 약화시켰다. 갑작스러운 연결망의 약화는 결국 ⑧과 같은 프로젝트의 파국을 야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볼 때, 결국 결정적인 좌초지점은 ⑥과 ⑦로 볼 수 있을 것이다. ③ ④ ⑤에서 계속 우상향으로 비스듬히 올라간 것은, 당시 북한 사회에서 과학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속성상 국소적 연결망과 포괄적 연결망이 중첩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주체과학의 전범으로 떠받들어진 봉한학설이 침몰하면서 북한사회는 전반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몇 년 지난 1970년대 초부터 북한에서는 역설적으로 '주체과학'이 체계를 갖추며 본격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미 정치사상 부문을 비롯한 사회 전 분야로 확대되어 나간 주체 확립, 주체 사상화는 나름의 관성력과 생명력을 지녔고 그것은 이제 거꾸로, 한동안 주춤거린 과학계로 되돌아와서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동의학은 이무렵부터 자체의 독립성이 한층 강화되는 모습으로 재기하여 나타났다.
) 김근배, 위의 글, 19쪽.
국소적 연결망의 변화를 살펴볼 때, 실제로 봉한학설의 옳고 그름을 둘러싼 논쟁이 북한에서 공개적으로 벌어진 적은 없다. 그러나 그 '내용'에 대한 논쟁 없이도 봉한학설은 하나의 실존하는 프로젝트로 북한에서 몇 년간 위세를 떨쳤다. 오히려 봉한학설이 정치적으로는 주체과학의 전범으로 받들어지고, 학문적으로는 경락연구소를 통해 후속 연구를 촉발시켰다는 것이 봉한학설이라는 프로젝트의 진짜 내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과학 이론이 사회 제반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이 이른바 '선진국'과는 달리 사회 제반 분야를 한꺼번에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봉한학설의 성쇠 과정은 과학과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동시에 발달시켜야 한다는 힘겨운 과제를 안고 출발한 탈식민지사회(post-colonial society)에서 과학 이론이 사회 다른 분야들과 어떻게 연결망을 형성해 나가는지, 그리고 그들 탈식민지사회가 외부 특히 중심부 국가로부터의 충격에 어떻게 영향받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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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11
  • 저작시기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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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46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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