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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완벽한 주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왜 그는 자신의 아들을 찾으러 가지 않았을까? 왜 그는 장현삼이 하던대로 그저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는 정원의 여름을 바라보았을까? 만약 그가 자신의 자아를 완벽하게 깨닫고 자신을 주체로 인식했다면 결코 아들을 빼앗기고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원래의 자기자신으로 돌아온 것은 장현삼이 그렇게 하도록 놓아주었기 때문이지 결코 자신의 능동적인 쟁취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다. 장현삼이 그를 떠나지 않고 계속 그를 자신의 몸으로 부리었다면, 이만복은 끊임없이 수렁속에 빠진 기분을 느끼면서도 결코 그 관계를 깨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만복은 결코 자신의 수동성을 극복해 내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이 자신의 자아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있다면 실로 잘못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오히려 차라리 장현삼이 소설 속에서 끄집어 내었던 "전생"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원래 정해져 있던 인연이라는 것. 이만복과 장현삼의 관계는 시작부터 그러했던 것이고, 이만복이 장현삼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면서 자신의 의지를 잃어버린 것도 그들의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만복이 자신의 핏줄인 아들을 쉽사리 포기해 버리는 결말은 이러한 의미가 아니면 결코 설명되어지기 힘든 부분이다.
전체적으로 음산한 분위기의 소설이었고, 정말 단편다운 꽉 짜인 구조의, 군더더기 없는 소설이었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 이만복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이만복은 어쩐지 제 2의 장현삼이 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왠지 오싹한 기분이었다.
전체적으로 음산한 분위기의 소설이었고, 정말 단편다운 꽉 짜인 구조의, 군더더기 없는 소설이었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 이만복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이만복은 어쩐지 제 2의 장현삼이 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왠지 오싹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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