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가가 십이도(十二徒)의 교육을 그 만큼 중히 여겼다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말기 국학부흥정책에 십이도(十二徒)는 점점 국학에 눌리어 마지막 왕인 공민왕 3년(1391)에 폐지되고 말았으니 십이공도는 문종 이후 약 3백수십년간 존속한 셈이다.
십이도(十二徒)는 우선 그 성격에 있어서 사립으로서 산만한 개인교수 글방이 아니라, 조직적이며 계획성 있는 학숙이었다는 점과 많은 사제가 유학의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 한데 엉키어 가르치고 배우며 장기간을 두고 전통적으로 계승되어간 하나의 학별로서의 사학이라는 점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십이도(十二徒)는 관학인 국자감이 부진하고 향교와 학당이 수립되기 전의 고려의 문교(文敎)와 유학 교육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또한 중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f무인 정권시대 이후에도 십이도(十二徒)에 이규보, 정운경의 경우와 같이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공부한 것을 볼 때, 친원(親元) 이후로 신유학을 받아들여 크게 문운(文運)의 진전을 가져오는 소지를 닦아주었고, 또한 그 뒤에도 국학과 더불어 고려말 유학 발달에 크게 작용하고 나아가 조선조의 유학의 전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 서당(書堂)
고려시대의 서당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그 교육 상황을 잘 알 수는 없으나 다만 송나라 사람 서경(徐競)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통하여 어느 정도 그 모습을 짐작 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마을의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 두셋이 서로 바라 보이며, 민간의 미혼 자제가 무리로 모여 스승에게 경(經)을 배우고, 좀 성장하면 끼리끼리 벗을 택하여 절간(사(寺)), 도교(道敎)의 건물(관(觀))에 가서 공부하고, 졸오(卒俉) 동치(童穉)들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인종 당시 고려사회에 있어서의 학풍을 엿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그 당시에 서당(書堂)이 많이 있어 지방의 민간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의 서당이 그 수준에 있어서 초등교육기관의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서당(書堂)의 시원(始源)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도경에 의하면 당시 서당이 지방에 많이 산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서당이 고려 사회에서 출발 했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생각컨데 서당이 적어도 초등 교육기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명칭이야 어떻든 삼국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자(漢字)는 이미 한사군(漢四郡)과의 접촉 과정에서 전래되었고, 고구려의 태학, 경당, 신라의 국학에 있어서 교과목이 유학의 경전(經典) 위주로 편성되어 있어 이러한 과목들은 그 수준으로 보아 초등 정도의 학력 이수자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초등 교육기관이 그 규모야 어떻든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라 아니할 수 없다. 서당제도는 조선조에 와서 아주 발달하였는데, 이는 아무튼 고려의 서당 제도를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십이도(十二徒)는 우선 그 성격에 있어서 사립으로서 산만한 개인교수 글방이 아니라, 조직적이며 계획성 있는 학숙이었다는 점과 많은 사제가 유학의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 한데 엉키어 가르치고 배우며 장기간을 두고 전통적으로 계승되어간 하나의 학별로서의 사학이라는 점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십이도(十二徒)는 관학인 국자감이 부진하고 향교와 학당이 수립되기 전의 고려의 문교(文敎)와 유학 교육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또한 중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f무인 정권시대 이후에도 십이도(十二徒)에 이규보, 정운경의 경우와 같이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공부한 것을 볼 때, 친원(親元) 이후로 신유학을 받아들여 크게 문운(文運)의 진전을 가져오는 소지를 닦아주었고, 또한 그 뒤에도 국학과 더불어 고려말 유학 발달에 크게 작용하고 나아가 조선조의 유학의 전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 서당(書堂)
고려시대의 서당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그 교육 상황을 잘 알 수는 없으나 다만 송나라 사람 서경(徐競)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통하여 어느 정도 그 모습을 짐작 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마을의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 두셋이 서로 바라 보이며, 민간의 미혼 자제가 무리로 모여 스승에게 경(經)을 배우고, 좀 성장하면 끼리끼리 벗을 택하여 절간(사(寺)), 도교(道敎)의 건물(관(觀))에 가서 공부하고, 졸오(卒俉) 동치(童穉)들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인종 당시 고려사회에 있어서의 학풍을 엿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그 당시에 서당(書堂)이 많이 있어 지방의 민간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의 서당이 그 수준에 있어서 초등교육기관의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서당(書堂)의 시원(始源)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도경에 의하면 당시 서당이 지방에 많이 산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서당이 고려 사회에서 출발 했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생각컨데 서당이 적어도 초등 교육기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명칭이야 어떻든 삼국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자(漢字)는 이미 한사군(漢四郡)과의 접촉 과정에서 전래되었고, 고구려의 태학, 경당, 신라의 국학에 있어서 교과목이 유학의 경전(經典) 위주로 편성되어 있어 이러한 과목들은 그 수준으로 보아 초등 정도의 학력 이수자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초등 교육기관이 그 규모야 어떻든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라 아니할 수 없다. 서당제도는 조선조에 와서 아주 발달하였는데, 이는 아무튼 고려의 서당 제도를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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