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장교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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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니발 장교의 자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것이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또한 반란을 진압해야했기때문에 떨어진상태에서 셀레우코스의 군대는 양동공격에 패배의 쓴잔을 마실수밖에 없었다.
결국 셀레우코스 2세는 기원전 242년 소수밖에 남지않은 패잔병을 이끌고 안티오크로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그는 어머니의 복수를 후손에게 맞기고 죽게 된다.
이후 셀레우코스 3세가 정권을 잡게되었지만 3년만에 암살당하게 된다.
결국 복수전을 치루는것은 안티오코스 3세의 손에 맞겨지게된다.
새롭게 왕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셀레우코스 3세였다 하지만 그는 3년이라는 짧은 통치후 암살당하게 된다.
이어 그의 동생이 왕좌에 오르니 그이름이 안티오코스 3세 나중에 안티오코스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 사람이다.
안티오코스 3세는 과거 셀레우코스 2세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치욕을 씻기위해서 군대를 소집하고 병력을 계속 보충하게된다.
그는 '때가오면'이라는 생각을 곱씹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엇다.
결국 그가 원하던 때는 짧은순간에 다가오게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죽음과 신왕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이집트의 관리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는 훈련된 병사들을 이끌고 페니키아의 소도시들 하나하나 공략하며 이집트의 영역을 취해갔다.
안티오코스는 승승장구하여 당시 잃어버렸던 셀레우키아 항구,코엘레 - 시리아속주와 페니키아의 도시인 티레와 프톨레마이스 그리고 인근의 소도시들을 탈환하였고 정복하게되었다.
한편 왕권을 물려받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어두웠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시리아의 남하를 저지하기위해 군대를 모아 유대지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두 나라간의 새로운 전쟁 서로간의 복수전이 된 이 전투의 승리자는 안티오코스에게 주어졌다.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두 군대가 충돌하여
프톨레마이오스는 급작스럽게 퇴각하였고, 안티오코스 3세는 유대의 지역들을 하나하나 점령하게된다.
안티오코스 3세는 승리와 아울러 불안해진 점령지를 바로잡기위해 프톨레마이스에서 머물다 기원전 217년에 도시 프톨레마이스에서 안티오크로 옮겨가게된다.
이후 패배의 설욕을 부르짖던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7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와 안티오코스 3세가 점령한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을 공략하게 된다.
이에 안티오코스 3세도 6만 8천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반격에 나서게된다.
두 군대는 이집트에서 별로 멀지않은 곳인 해안도시 '라피아'에서 대치하게 된다.
라피아 전쟁 흔히 4차 시리아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에서 시리아군대는 다시금 쓰디쓴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시리아보병 1만명과 기병300명의 피해, 4000명의 시리아군을 포로로 잡히는 큰 패배를 당하고 두 나라는 시리아측의 불합리한 조약을 맺으므로써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
시리아의 항구 셀레우키아 이외의 도시인 페니키아와 코엘레-시리아는 이집트로 가게되었던 것이다.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3세는 이렇게 불합리한 조약에 대해 또한 패배의 쓴잔에 모든것을 포기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기때문이었다.
그러기위해 그는 나라의 기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무리한 전쟁으로 피패해진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이후 여러분야에서 공적을 세워 불안하고 피패해졌던 나라를 다시금 부강하게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일으키게될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을 키우므로 그의 야심과 패배를 설욕할 기회를 만들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승리에 도취된상태에서 변화가 없었다. 결국 그는 방탕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나라의 사정은 계속 피폐해지기만 할뿐이었다.
결국 쾌락에 빠져있던 이집트의 왕은 5살난 아들을 곁에 두고 죽게 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5살난 아이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였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그리 좋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선대였던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나라를 돌보지않고 쾌락에 빠진데다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섭정인이었던 아카토클레스가 이집트사람들을 오만하게 대하는 바람에 많은수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던것이었다.
북쪽으론 시리아부터 남쪽으론 이집트까지 그들이 다스리던 속주국가들의 반란은 계속돼었고 유대또한 그 반란의 물결에 휩슬리게 된다.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안티오코스 3세는 항상 이집트를 예의주시하고있었다. 불안해진 정세를 계속 주시하던 시리아의 왕은 "때는 이때다 제우스는 우리를 돌아보신다." 오랜기다림속에서 그는 움직일때 라는것을 알게된것이었다.
과거의 뼈아픈 과거를 잊지않은 시리아의 왕은 자신의 대군이외에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외 동맹을 맺고 이집트로 남하하게된것이다.
안티오코스 3세는 파네아스(카이사레아 빌립보)에서 이집트의 명장 스코파스와 그의 1만 정예병을 물리치고 페니키아의 도시 시돈까지 밀고가게 된다.
시돈은 공략하기가 두려울정도로 막강한 성체를 가진 곳이었지만 포위공격인 "누벽(壘壁)"'을 서둘러 세워 기원전 198년에 페니키아 항구를 점령하였다.
이후 팔레스타인및 유대지역까지 점령하였지만 유대만큼은 쉽게 하지못했다. 결국 유대와의 관계는 안티오코스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4와의 기나긴 전쟁으로 연결되 버리게 된다.
시리아와 마케도니아 연합군은 결국 이집트 지역까지 내려와 이집트를 위협하게된다.
위협으로부터의 타계접을 찾던 어린왕과 그의 섭정인들은 결국 자신들이 할수있는 최대의 외교를 이룩했다 이른바 로마와의 동맹이 그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섭정인들은 로마로 가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결국 로마와 동맹결성을 이룩하게된다.
동맹국인 로마는 이미 2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부터 승리를 이룩하여 신흥강대국으로써 입김이 생기기 시작데다 그리스의 요청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대한 문제를 다루던 때였기에 이집트의 요청을 수락했던것이다.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 협박이란것을했다. 결국 로마의 강요에 못 이겨,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와의 평화조약을 맺게되면서 4차 시리아전쟁은 끝을 맺게된다.
여기까지가 대대로 이어지는 시리아와 이집트간의 전쟁입니다. 이 사건이후로 명장 한니발이 시리아측에 오면서 로마와의 대립이 이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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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18
  • 저작시기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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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5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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