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시니, 조키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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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이탈리아의 작곡가

2.주요 작품

3.롯시니

4.R.슈트라우스

본문내용

을 받아 마이닝겐에서 뷜로의 보조 지휘자 겸 합창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브람스, 베를리오즈, 바그너, 리스트 등의 새로운 음악을 알게 되었으며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1886년 뮌헨 가극장의 제3악장이 되었고, 1889년 바이마르 궁정 지휘자가 되었으며, 1894년에는 다시금 뮌휀, 1898년에는 베를린, 1919년부터 5년동안은 빈 국립 가극장의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1923년에 남 아메리카로 가서 재차 미국을 방문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1932년 나치스 정책은 유대인을 배척하였으며 음악가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그는 처음에 나치스 정권에 협조하여 정부가 설치한 음악국의 총재로 있었는데, 얼마 후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작품 [한여름 밤의 꿈]을 말살하고 대신 새 제목으로 작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이를 거부하고 유대인 츠바이크의 대본에 희극 [침물의 여자]를 작곡하였다. 그로 인해 당국으로부터 미움을 사서 1935년에 총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1945년에 독일이 패망하자 그는 나치스 협력자의 혐의로 비난을 받아 작품은 악계에서 매장되어 곤란한 때도 있었다. 그는 생활을 위해 80여세에 런던, 빈 등지에서 지휘봉을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84세의 탄생일을 맞이하는 해에 그는 나치스 숙청 재판소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시금 햇빛을 보게 되어 85세 생일 때는 그를 축하하는 음악회가 각지에서 개최되었고 작품도 연주되어 절찬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인간적으로 신경질이 있는 반면 완고한 사람이며 정력적인 활동가였다. 그는 어느 파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고 시대에 따라 환영되는 것도 믿지 않았다. 그는 형식에 중점을 둔 고전주의적인 작곡가였고 젊었을 때는 주로 교향곡과 실내악을 작곡하였다.
다시금 그는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의 표제음악의 영향으로 음악을 형식적인 구성에서 해방하고 음을 수단으로 시와 극과 이야기 등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의 표현력은 대단한데, 라이트 모티브(Leitmotiv)의 기법과 변주법에 의한 기량은 놀랄 만하며 관현악법의 능숙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고전에 대한 애착심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소편성에 의한 기악곡은 주목할 만하다. 가곡 분야에도 200곡 이상이나 되는데, 독일의 예술 가곡 작곡자로서의 비중은 대단하다.
그의 작품은 교향적 환상곡 [이탈리아에서], 교향시로 [돈 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돈키호테][영웅의 생애] 등이 있고 [알프스 교향곡]과 모음곡으로 [서민 귀족], 악극으로 [군트람][불의 결핍][살로메][일렉트라][장미의 기사][그림자 없는 여인][간주곡][이집트의 헬레나][아라벨라][침묵의 여자] 등이 있다. 그 밖에도 교향시,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 많이 있다.
그는 리스트의 뒤를 이어 교향시에 표제적인 내용과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 근대적인 작곡 수법을 가미한 작곡가이다. 따라서 [살로메][엘렉트라][장미의 기사] 등으로 바그너가 개척한 악극에 새로운 발전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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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20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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