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머릿말-전쟁의 원인
2.본문-경과
3.꼬릿말-결과
2.본문-경과
3.꼬릿말-결과
본문내용
며 서로 양보하지 않아 오랜동안 전투가 벌어졌다.
이 벌어졌는데, 여기서는 아테네가 패배하였다. 이 플레미리옴의 패배는 아테네군이 열세에 몰리는 전기가 되는 최대의 원인이 되었다
) 이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물자가 안전하게 공급되는 입구를 아테네측은 잃어버리고, 시라쿠사 선단이 항구 입구에 정박해 그것을 방해했기 때문에 싸우지않고서는 물자의 보급이 불가능해지고, 여기에 더하여 이 패퇴는 아테네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되었다.
. 또한 라케다이몬과 그 동맹군(펠로폰네소스동맹)이 아테네의 데켈레아를 점거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아테네측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 후 계속된 해전과 육상전에서 라케다이몬과 시라쿠사 측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에 아테네의 장군 데모스테네스는 총철수를 제안하고, 이젠 공략의 희망도 없는 시라쿠사보다는 자신들의 아티카에 성채를 쌓고있는 적에 도전하는 것이 아테네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여기에 있는 것은 돈의 낭비라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니키아스는 현재 시라쿠사측은 아테네군에 비하면 열세에 놓여있다고 주장하고, 조만간 궁지에 빠질 것이라 말하며 철수를 부정했다. 이리하여 아테네군은 시간을 낭비한 채 그 땅에 머무르고 있었다. 후에 크고 작은 전투에서 아테네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고 이윽고 데모스테네스는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에 시라쿠사군은 니키아스를 추격해 데모스테네스가 항복한 것을 전하고 니키아스의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니키아스는 이 말을 믿지 않고 척후 기병을 보낼 동안 휴전할 것을 제의했다.
또한 니키아스는 길리포스와 시라쿠사인에 대해 아테네인을 대표해 몇가지 조건
) 시라쿠사측이 만약 니키아스의 군대를 풀어주면 이번 전쟁에서 시라쿠사가 지출한 총액을 아테네인이 변상하고 그 변제가 완료될 때까지 1인당 1탈란트의 게산으로 아테네 병사를 인질로 시라쿠사가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을 내걸며 조약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라쿠사측은 이를 거절하고 아테네군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테네군은 항복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시라쿠사 시로 돌아온 시라쿠사군과 그 동맹군은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도 사형시켰다. 아테네는 모든 면에서 완패하고, 그 모든 고난도 물거품으로 화했으며, 그들의 해륙 양면은 궤멸당했다. 게다가 많은 출정 병사중에서 귀환한 자는 극히 드물었다. 이로써 아테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스파르타 역시 전쟁에 지쳐 꾸물거리는 사이에 아테네는 다시 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 후 아테네에서는 寡頭派가 득세하여 4백인회를 구성하였으나, 곧 민주파가 세력을 회복하여 최후의 일전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들의 사면을 받고 귀국한 알키비아데스는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의 부하 잘못으로 인한 작은 실패가 다시 그의 정적에게 그를 규탄할 구실을 주어 그는 소아시아로 도망갔다. 지상군은 막강하였으나 함대가 빈약했던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의 식민시를 넘겨주는 조건 하에 페르시아의 원조를 확보하고, 아테네의 식량공급로인 흑해로의 해역을 차단하고 나섰다. 이를 맞이한 아테네함대는 스파르타함대에 승리하였으나
) BC.406 년의 일이다.
폭풍우로 인한 水兵의 익사자가 의외로 많았다. 격분한 익사자의 가족들은 민회에서 장군들을 규탄하여 6명의 장군들이 집단 처형되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시민들은 곧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헬레스폰트 입구에서 아테네함대는 결정적으로 패하였다
) BC. 405년의 일
.
3.꼬릿말
【결과】-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하고 장성(長城)
) 피레우스의 성벽과 아테네를 연결하는 長城
을 헐었으며,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시로서 그 지휘에 종속하게 되었으며 함대는 12척으로 제한되었다. 코린트와 메가라는 아테네의 완전파괴를 주장하였으나 스파르타는 과거의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의 영광을 고려하여 아테네의 독립만은 허용하였다. 이제 아테네의 영광은 사라진 것
이다. 아테네제국의 확대라는 형태로서 그리스세계의 정치적 통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
이었으나, 그 희박한 가능성마저 사라졌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定見없는 민중지배의 어리
석음과 위험을 아테네의 국운을 걸고 드러내놓음으로써 페리클레스의 이상과 기대가 현실과
얼마나 거리가 멀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 남은 길은 폴리스 상호간의 끊임없
는 대립과 갈등을 통한 그리스 전체의 쇠퇴였다.
★참고문헌★
민석홍, 西洋史槪論, 三英社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전쟁사(상,하) , 범우사
이 벌어졌는데, 여기서는 아테네가 패배하였다. 이 플레미리옴의 패배는 아테네군이 열세에 몰리는 전기가 되는 최대의 원인이 되었다
) 이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물자가 안전하게 공급되는 입구를 아테네측은 잃어버리고, 시라쿠사 선단이 항구 입구에 정박해 그것을 방해했기 때문에 싸우지않고서는 물자의 보급이 불가능해지고, 여기에 더하여 이 패퇴는 아테네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되었다.
. 또한 라케다이몬과 그 동맹군(펠로폰네소스동맹)이 아테네의 데켈레아를 점거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아테네측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 후 계속된 해전과 육상전에서 라케다이몬과 시라쿠사 측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에 아테네의 장군 데모스테네스는 총철수를 제안하고, 이젠 공략의 희망도 없는 시라쿠사보다는 자신들의 아티카에 성채를 쌓고있는 적에 도전하는 것이 아테네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여기에 있는 것은 돈의 낭비라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니키아스는 현재 시라쿠사측은 아테네군에 비하면 열세에 놓여있다고 주장하고, 조만간 궁지에 빠질 것이라 말하며 철수를 부정했다. 이리하여 아테네군은 시간을 낭비한 채 그 땅에 머무르고 있었다. 후에 크고 작은 전투에서 아테네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고 이윽고 데모스테네스는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에 시라쿠사군은 니키아스를 추격해 데모스테네스가 항복한 것을 전하고 니키아스의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니키아스는 이 말을 믿지 않고 척후 기병을 보낼 동안 휴전할 것을 제의했다.
또한 니키아스는 길리포스와 시라쿠사인에 대해 아테네인을 대표해 몇가지 조건
) 시라쿠사측이 만약 니키아스의 군대를 풀어주면 이번 전쟁에서 시라쿠사가 지출한 총액을 아테네인이 변상하고 그 변제가 완료될 때까지 1인당 1탈란트의 게산으로 아테네 병사를 인질로 시라쿠사가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을 내걸며 조약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라쿠사측은 이를 거절하고 아테네군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테네군은 항복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시라쿠사 시로 돌아온 시라쿠사군과 그 동맹군은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도 사형시켰다. 아테네는 모든 면에서 완패하고, 그 모든 고난도 물거품으로 화했으며, 그들의 해륙 양면은 궤멸당했다. 게다가 많은 출정 병사중에서 귀환한 자는 극히 드물었다. 이로써 아테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스파르타 역시 전쟁에 지쳐 꾸물거리는 사이에 아테네는 다시 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 후 아테네에서는 寡頭派가 득세하여 4백인회를 구성하였으나, 곧 민주파가 세력을 회복하여 최후의 일전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들의 사면을 받고 귀국한 알키비아데스는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의 부하 잘못으로 인한 작은 실패가 다시 그의 정적에게 그를 규탄할 구실을 주어 그는 소아시아로 도망갔다. 지상군은 막강하였으나 함대가 빈약했던 스파르타는 소아시아의 식민시를 넘겨주는 조건 하에 페르시아의 원조를 확보하고, 아테네의 식량공급로인 흑해로의 해역을 차단하고 나섰다. 이를 맞이한 아테네함대는 스파르타함대에 승리하였으나
) BC.406 년의 일이다.
폭풍우로 인한 水兵의 익사자가 의외로 많았다. 격분한 익사자의 가족들은 민회에서 장군들을 규탄하여 6명의 장군들이 집단 처형되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시민들은 곧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헬레스폰트 입구에서 아테네함대는 결정적으로 패하였다
) BC. 405년의 일
.
3.꼬릿말
【결과】-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하고 장성(長城)
) 피레우스의 성벽과 아테네를 연결하는 長城
을 헐었으며,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시로서 그 지휘에 종속하게 되었으며 함대는 12척으로 제한되었다. 코린트와 메가라는 아테네의 완전파괴를 주장하였으나 스파르타는 과거의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의 영광을 고려하여 아테네의 독립만은 허용하였다. 이제 아테네의 영광은 사라진 것
이다. 아테네제국의 확대라는 형태로서 그리스세계의 정치적 통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
이었으나, 그 희박한 가능성마저 사라졌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定見없는 민중지배의 어리
석음과 위험을 아테네의 국운을 걸고 드러내놓음으로써 페리클레스의 이상과 기대가 현실과
얼마나 거리가 멀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 남은 길은 폴리스 상호간의 끊임없
는 대립과 갈등을 통한 그리스 전체의 쇠퇴였다.
★참고문헌★
민석홍, 西洋史槪論, 三英社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전쟁사(상,하) ,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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