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다 구하는 좋은 나라라고 외친다.
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약간 씁쓸했다. 두 여자의 자살을 막기 위해 손을 들고 뛰어 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슬로콤의 존재가 델마와 루이스의 죽음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만 같고, 그녀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한 그런 애매함이 이 영화의 옥의 티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건 전체가 일상적 삶에서의 우연한 일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 [델마와 루이스]가 지닌 한계라고 하겠다.
델마와 루이스는 좀더 나은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밤새도록 길을 달리면서 지치고, 법을 피해야 하고, 깨어 있으려고 술병을 홀짝거린다. 여기서 살아 남는 다는 말은 의존적인 아내의 역할과 불행한 결혼, 죄 없이 희생자의 멍에를 써야 만 하는 현실, 혼자서는 충분히 벌지 못하는 독신여성이라는 덫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동안 살아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들의 질주는 살아남는 것인 동시에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전까지 살던 그녀들의 삶은 삶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이고, 그녀들이 마지막에 행한 죽음을 향한 질주는 행복을 향한 질주이다. 그녀들이 죽음을 향해 액셀레이터를 밟지 않았더라면 브레히트의 글에 나오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언젠가 오늘의 작가 상을 받은 모 작가가 소설 제목으로 우려먹은 적도 있다.
을 뼈저리게 체험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들의 죽음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과 여성의 해방사이의 타협점이 아니라 해방된 행복한 미래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빠른 전개 끝에 맞는 라스트의 정지화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약간 씁쓸했다. 두 여자의 자살을 막기 위해 손을 들고 뛰어 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슬로콤의 존재가 델마와 루이스의 죽음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만 같고, 그녀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한 그런 애매함이 이 영화의 옥의 티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건 전체가 일상적 삶에서의 우연한 일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 [델마와 루이스]가 지닌 한계라고 하겠다.
델마와 루이스는 좀더 나은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밤새도록 길을 달리면서 지치고, 법을 피해야 하고, 깨어 있으려고 술병을 홀짝거린다. 여기서 살아 남는 다는 말은 의존적인 아내의 역할과 불행한 결혼, 죄 없이 희생자의 멍에를 써야 만 하는 현실, 혼자서는 충분히 벌지 못하는 독신여성이라는 덫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동안 살아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녀들의 질주는 살아남는 것인 동시에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전까지 살던 그녀들의 삶은 삶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이고, 그녀들이 마지막에 행한 죽음을 향한 질주는 행복을 향한 질주이다. 그녀들이 죽음을 향해 액셀레이터를 밟지 않았더라면 브레히트의 글에 나오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언젠가 오늘의 작가 상을 받은 모 작가가 소설 제목으로 우려먹은 적도 있다.
을 뼈저리게 체험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들의 죽음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과 여성의 해방사이의 타협점이 아니라 해방된 행복한 미래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빠른 전개 끝에 맞는 라스트의 정지화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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