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그리스도인과윤리
- 산상설교를 중심으로 통감한 기독교윤리 사상사
- 성서윤리
- 신학과 윤리
- 자연법과 윤리
- 규범과 상황
- 교회와 사회
- 문화와 윤리
-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윤리
- 산상설교를 중심으로 통감한 기독교윤리 사상사
- 성서윤리
- 신학과 윤리
- 자연법과 윤리
- 규범과 상황
- 교회와 사회
- 문화와 윤리
-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윤리
본문내용
나지 못하였으나 그 본연의 자세를 찾아가 보면 히브리 사상의 삼중론적인 구조 속에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 운동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어느 운동이든지 그것이 운동으로 지속되려면 그 이면에 신념이 작동해서 움직여 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창시자들중의 한 사람이었던 템플 대주교도 기도와 행위의 올바른 관계를 설명하면서 주장하기를 "행위가 주요인이고 기도는 그 행위를 돕기 위함이라는 착상은 잘못이다. 오히려 기도가 주요인이며 행위는 그 기도의 시험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은연 중에 에큐메니칼 운동이 행동 위주로 지향하는 것을 신앙의 핵심적 요소인 기도로 견제한 실례라고 본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원과 목적
세계 선교 활동을 하고 잇던 개신교 교파들이 교단 간의 상호 협력을 위해서 혹은 불필요한 분파적 경쟁을 배제하기 위해서 1910년 8월에 에딘버그에 모여 논의하게 되었다. 그 모임을 마감할 때 계속 모일 것을 다짐한 나머지 1921년에 국제 선교 협의회를 구성하였고, 이 모임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하는 데 일익을 하는 국제 기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케 하는 또 하나의 역할은 기독학생 운동으로서, 1895년 8월 스웨덴의 바드스테나에서 개최되었던 한 청년 집회가 세계 기독학생연맹을 결성 시키면서였다. 이연맹의 구성 목적은 신앙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세계 학생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며 영적 생활의 강화 및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선교한다는 것이다. 또하나의 중요한 영향은 구미 각국에서 산업화 현상으로 인하여 생긴 여러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기독교 사회 운동들이 일어났던 점이다. 1927년 로잔느에서의 "신앙가 직제에 관한 세계 대회"와 1925년 스톡홀름에서의 "삶과 일에 관한 국제기독교 대회,가 그것이다. 이 두 운동이 그 후 1937년 에딘버그와 옥스퍼드에서 각각 제2차 세계대회를 가진 후 역사적인 결성, 곧 1948년 8월 23일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를 진수시켰던 것이다.
에큐메니칼 사회 윤리
공통적 사회 과제의 발견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스톡홀름 세계대회에 모인 37개국의 600명 r회 지도자들의 관심이 사회 정의와 세계 평화의 문제에 솔렷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정의와 평화의 문제는 그들의 공통적인 관심이었으며 동시에 긴급한 과제이었기에 "교리는 분열하여도 봉사는 연합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착수되었다.
스톡홀름 세계 대회를 통해서 결성된 기독교 사회 이념들은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실생활화"의 첫 발걸음이 되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개신교 사회 사상의 신학적 기초 형성
두 번째 디딤돌이 되었던 사건은 1937년 7월 옥스퍼드에서 개최되었던 실생활 운동의 제2차 세계대회였다. 이 대회는 40개 국가 120교회의 425명의 대표들이 모여 "교회와 사회 공동체 및 국가"라는 주제를 걸고 개신교 사회 사상의 기초 작업을 쌓았다.
책임 사회의 이념과 윤리적 규범
이 사회 이념의 배후에는 1937년 옥스퍼드 대회 때 굳힌 사상, 곧 기독교 사회 제도는 있을 수 없으며 어떠한 기독교 사회 직제도 결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 갈려 있었다. 이러한 사상과 확신이 결국 자유와 질서와 정의의 균형을 갖추는 "책임 사회"의 이념으로 낙착을 보았던 것이다. 존베네트는 이 규범적 원칙과 구체적 문제와의 관계를 포용할 수 있는 책임 사회 이념 자체를 "중간 공리"라고 성격지워 주었다. 책임 사회 이념을 하나의 윤리적인 규범이라고 할 때 논리적으로 거기에는, 보편적인 기독교 진리를 해명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을 것이며 이에 따르는 일반 사회 문제를 해결해 갈 구체적인 표적이 있음을 전제한다. 책임 사회의 이념 속에는 근사치적인 목적이있고 그 목적 앞에는 궁극적인 목표가 전제되고 그 목적 뒤에는 구체적인 표적 도는 그대와 그 곳마다 내려져야 하는 실제적인 결단이 있어서 그 규범의 내용이 현실적으로 충실하게 된다. 책임 사회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그 결정적인 대목은 근사치적인 목적이 바로 "책임 사회"자체를 구현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책임 의식의 이중적 요인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전제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책임 이행이 불가능하며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어야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자유를 영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임 사회란 "또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세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그 실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민중 앞에 책임을 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긍으로 책임 사회의 규범의 마지막 대목은 근사치적인 목적들인 사회 정의와 공공 질서가 구체적인 표적들로 드러나면서 인간의 행동 규범의 표준을 더욱 선명하게 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급격한 사회 변동과 기독교인의 책임
제1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있었던 바로 그 다음 해인 1949년 12월 방콕에서는 동부 아시아 교회협의회가 개최되었고 이 모임에서는 아시아 특유의 정치 경제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총회에서 또 하나 특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까지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아무래도 서방에 치우쳤는데 이번은 그 장소도 아시아였고 참석한 대표들의 비례도 균형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사회 발전과 혁명의 이념
뉴델리 총회 직후 "사회 문제 특별보조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그 목적은 "사회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계획이나 혹은 프로그램을 착수함에 있어서 기술적인 자문을 하여 주는 것이었다. 이 세계대회에서 논의된 요점은 제3세계에 있어서의 경제 성장과 사회 변동의 진행을 위하여서 "인간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하는 발전에 대한 본질적 이해라 하겠다. 이 대회는 분명히 하기를 교회가 물론 경제 성장을 환영해야 하지만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배제해야 한다고 하면서 "물질적 위주의 발전은 그거시 국가이든 가정이든 간에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가치와 삶의 목적을 저버리게 한다고 경고했다.앞으로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앙의 생활화라는 자기 실험을 거친 신앙 고백과 사회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전개되어야 할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 운동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어느 운동이든지 그것이 운동으로 지속되려면 그 이면에 신념이 작동해서 움직여 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창시자들중의 한 사람이었던 템플 대주교도 기도와 행위의 올바른 관계를 설명하면서 주장하기를 "행위가 주요인이고 기도는 그 행위를 돕기 위함이라는 착상은 잘못이다. 오히려 기도가 주요인이며 행위는 그 기도의 시험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은연 중에 에큐메니칼 운동이 행동 위주로 지향하는 것을 신앙의 핵심적 요소인 기도로 견제한 실례라고 본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원과 목적
세계 선교 활동을 하고 잇던 개신교 교파들이 교단 간의 상호 협력을 위해서 혹은 불필요한 분파적 경쟁을 배제하기 위해서 1910년 8월에 에딘버그에 모여 논의하게 되었다. 그 모임을 마감할 때 계속 모일 것을 다짐한 나머지 1921년에 국제 선교 협의회를 구성하였고, 이 모임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하는 데 일익을 하는 국제 기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케 하는 또 하나의 역할은 기독학생 운동으로서, 1895년 8월 스웨덴의 바드스테나에서 개최되었던 한 청년 집회가 세계 기독학생연맹을 결성 시키면서였다. 이연맹의 구성 목적은 신앙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세계 학생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며 영적 생활의 강화 및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선교한다는 것이다. 또하나의 중요한 영향은 구미 각국에서 산업화 현상으로 인하여 생긴 여러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기독교 사회 운동들이 일어났던 점이다. 1927년 로잔느에서의 "신앙가 직제에 관한 세계 대회"와 1925년 스톡홀름에서의 "삶과 일에 관한 국제기독교 대회,가 그것이다. 이 두 운동이 그 후 1937년 에딘버그와 옥스퍼드에서 각각 제2차 세계대회를 가진 후 역사적인 결성, 곧 1948년 8월 23일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를 진수시켰던 것이다.
에큐메니칼 사회 윤리
공통적 사회 과제의 발견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스톡홀름 세계대회에 모인 37개국의 600명 r회 지도자들의 관심이 사회 정의와 세계 평화의 문제에 솔렷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정의와 평화의 문제는 그들의 공통적인 관심이었으며 동시에 긴급한 과제이었기에 "교리는 분열하여도 봉사는 연합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착수되었다.
스톡홀름 세계 대회를 통해서 결성된 기독교 사회 이념들은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실생활화"의 첫 발걸음이 되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개신교 사회 사상의 신학적 기초 형성
두 번째 디딤돌이 되었던 사건은 1937년 7월 옥스퍼드에서 개최되었던 실생활 운동의 제2차 세계대회였다. 이 대회는 40개 국가 120교회의 425명의 대표들이 모여 "교회와 사회 공동체 및 국가"라는 주제를 걸고 개신교 사회 사상의 기초 작업을 쌓았다.
책임 사회의 이념과 윤리적 규범
이 사회 이념의 배후에는 1937년 옥스퍼드 대회 때 굳힌 사상, 곧 기독교 사회 제도는 있을 수 없으며 어떠한 기독교 사회 직제도 결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 갈려 있었다. 이러한 사상과 확신이 결국 자유와 질서와 정의의 균형을 갖추는 "책임 사회"의 이념으로 낙착을 보았던 것이다. 존베네트는 이 규범적 원칙과 구체적 문제와의 관계를 포용할 수 있는 책임 사회 이념 자체를 "중간 공리"라고 성격지워 주었다. 책임 사회 이념을 하나의 윤리적인 규범이라고 할 때 논리적으로 거기에는, 보편적인 기독교 진리를 해명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을 것이며 이에 따르는 일반 사회 문제를 해결해 갈 구체적인 표적이 있음을 전제한다. 책임 사회의 이념 속에는 근사치적인 목적이있고 그 목적 앞에는 궁극적인 목표가 전제되고 그 목적 뒤에는 구체적인 표적 도는 그대와 그 곳마다 내려져야 하는 실제적인 결단이 있어서 그 규범의 내용이 현실적으로 충실하게 된다. 책임 사회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그 결정적인 대목은 근사치적인 목적이 바로 "책임 사회"자체를 구현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책임 의식의 이중적 요인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전제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책임 이행이 불가능하며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어야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자유를 영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임 사회란 "또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세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그 실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민중 앞에 책임을 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긍으로 책임 사회의 규범의 마지막 대목은 근사치적인 목적들인 사회 정의와 공공 질서가 구체적인 표적들로 드러나면서 인간의 행동 규범의 표준을 더욱 선명하게 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급격한 사회 변동과 기독교인의 책임
제1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있었던 바로 그 다음 해인 1949년 12월 방콕에서는 동부 아시아 교회협의회가 개최되었고 이 모임에서는 아시아 특유의 정치 경제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총회에서 또 하나 특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까지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아무래도 서방에 치우쳤는데 이번은 그 장소도 아시아였고 참석한 대표들의 비례도 균형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사회 발전과 혁명의 이념
뉴델리 총회 직후 "사회 문제 특별보조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그 목적은 "사회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계획이나 혹은 프로그램을 착수함에 있어서 기술적인 자문을 하여 주는 것이었다. 이 세계대회에서 논의된 요점은 제3세계에 있어서의 경제 성장과 사회 변동의 진행을 위하여서 "인간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하는 발전에 대한 본질적 이해라 하겠다. 이 대회는 분명히 하기를 교회가 물론 경제 성장을 환영해야 하지만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배제해야 한다고 하면서 "물질적 위주의 발전은 그거시 국가이든 가정이든 간에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가치와 삶의 목적을 저버리게 한다고 경고했다.앞으로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앙의 생활화라는 자기 실험을 거친 신앙 고백과 사회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전개되어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