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제 1 장
이스라엘 국가형성 시기 고대 근동의 역사적 상황(주전1200년경)

제 2장
이스라엘의 고대사

제 3장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제 4장
국가 이전의 이스라엘

제 5장
사울의 국가건설

제 6장
다윗과 그의 시대

제7장
솔로몬의 시대

제 8장
왕국 분열과 북왕국 멸망까지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

제 9장
722-586년 동안의 유다나라

제 10장
바빌론 통치시대

제11장
페르샤 시대

제12장
헬레니즘 시대

제13장
로마시대

결 론

본문내용

시딤 단체에서 특히 중요한 단체가 또 하나 생겨났다. 그것은 후에 바리사이파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도 민중과 분리해서 살았다.
제 13장
로마시대
1. 헤로데와 헤로데 가문
헤로데파는 라틴어로 헤로디아누스(Hero-dianus), 곧 헤로데 가문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헤로데 집안의 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다른 사람들은 헤로데의 관리로 여긴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헤로데파는 헤로데의 종들이나 관리들이 아니라 헤로데의 통치에 우호적인 세도가들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헤로데파는 헤로데 왕조의 통치를 지지하고 그 권력의 혜택을 나누어 갖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헤로데 대왕은 자기 주변에 유다인 지지자들을 곁에 두려하지 않았으므로, 헤로데파는 헤로데 안티파스 통치 아래에서 발전된 파당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권력의 속성상 더 큰 권력이자 자기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로마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지지한다. 헤로데파는 사두가이파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때로는 이 두 파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언뜻 보기에 이 두 파를 연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인다. 헤로대 대왕은 하스모니아 가문을 배척하였으며, 그와 그의 손자 아그리빠 1세는 하스모니아 가문을 지지하는 사두가이파에서가 아니라 보에투시아 가문에서 대사제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의 폐위(기원 6년)와 아그리빠 1세의 유다 통치권 획득(41년) 사이에 상황이 반전되었다.
헤로데 아그리빠 2세(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리빠)는 유다 반란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유다 항쟁 내내 로마의 충실한 지지자로 남았기 때문에 비록 제한적이긴 해도 유다의 꼭두각시 통치자 행세를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한 티투스 장군(후에 황제가 됨)와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다. 헤로데파는 아그리빠 2세가 말년에 로마로 거처를 옮긴 후 95년 사망하자 그와 함께 사라졌다
2. 유다전쟁
유다 임시정부는 엘르아잘 중심의 사제-시민집단이 주도하게 되는데, 이들은 도적떼들의 무장해제와 로마와의 타협을 통한 문제의 해결을 기도한다. 이들의 지도력은 1년 이상 계속된다.
한편 로마의 가장 영향력있는 군부세력의 지휘관인 베스파시안은, 66년 로마의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봉기 진압에 실패한 뒤, 67년초 6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이 반란의 진압을 위해 팔레스틴에 진군한다. 그는 우선 갈릴래아를 공격하는데, 그의 공격전술은 이른바 '초토화' 정책이었다. 점령지역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노예로 끌고 갔다. 이것은 전쟁유민의 급증을 초래했고, 이들 유민집단들 가운데 상당수가 도적떼로 돌변하게 되고, 이들이 크고 작은 규모의 세력을 형성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여든다. 이런 상황변화는 예루살렘의 주도권이 다시 젤롯데로 이전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한편 사제-시민집단은 대안적 지도자로 유다의 농촌에서 활약하고 있는 시몬 바르 기오라를 불러들인다. 그는 농민부대의 지휘관으로 66년 항쟁 때 이미 영웅적인 지도자로 부상하였지만 지휘권을 임시정부에 넘겨 주고 시골로 되돌아 왔었다. 그렇지만 그는 대중에게 메시아적 존재로 점점 부각되어 갔고, 기살라의 요한에게 내밀린 사제-시민집단은 과격한 요한 대신에 보다 원만한 그를 대안으로 택한 것이었다. 그는 넓은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가 농민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자 젤롯데의 다수가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대다수의 이탈로 지도자로서의 기반을 상실한 기살라의 요한은 또 다시 성전 안으로 밀려 들어갔고, 성전밖의 예루살렘 전역의 통제력은 시몬 바르 기오라에게 있었다.
이렇게 3분된 예루살렘의 지도력은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당할 때까지 계속된다. 로마군은 주후 70년 드디어 세 세력의 점령지를 장악함으로써 예루살렘을 다시 식민화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어 72/3년에 마사다 정렴에 성공함으로써 大유다 민족 민중항쟁은 종식되고 만다.
3. 바-코흐바의 폭동
132-135년에 로마에 항거하여 일어난 폭동이 바로 바-코흐바라를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불러진 것이다. 이 봉기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에루살렘을 쥬피터 신전에 있는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하려는 황제의 계획과 황제의 할례 금지가 원인이었다고 본다. 이 폭동을 진압하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그들이 사용한 게릴라 전법 때문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그래서 전에 브리타니아의 총독이었던 쥴리어스 세베루스아 같은 거물급 총독이 에집트에 파견디었다. 그래서 바-코흐바는 예루살렘 서쪽에서 저항하다가 벳 -테르에서 전쟁 중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결 론
이스라엘의 역사, 역시 쉽지 않은 역사임에 틀림없다. 수없이 많은 문화적 충돌과 정신적 갈등,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가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닐까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을 좀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을 정독함으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저자는 이스라엘 역사를 성서의 해석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어떤 인물을 말할 때 그 인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지리적 특징도 함께 설명하고 있다. 또한 주변 국가들의 정세도 함께 설명함으로써 필자의 이해를 도왔다. 족장 시대부터 성서의 중간기까지 너무도 많은 사건들을 일목 요연하게 정리 된 것 또한 큰 특징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단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예언자의 역할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나하는 것이다. 설령 그러하다하더라도 각주로써 성서의 말씀들을 넣어 주었다면 예언자들의 말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성서를 좀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스라엘 역사, 이 책을 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런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는 모습이 참으로 위대해 보였다. 한편 이런 상황 속에서도 계속 배반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바라보며 사랑으로 인내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의 삶이 현재 우리들의 삶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04.06.28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789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