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문제의 제기
Ⅱ.근대주의의 형성과 중·일로의 전파
Ⅲ.한국의 지식체제와 근대주의의 수용
Ⅳ.근대주의 수용방식의 특징과 한계
Ⅴ.맺음말
Ⅱ.근대주의의 형성과 중·일로의 전파
Ⅲ.한국의 지식체제와 근대주의의 수용
Ⅳ.근대주의 수용방식의 특징과 한계
Ⅴ.맺음말
본문내용
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週刊印刷新聞이 최초로 발간되었다. 중·일 두나라는 19세기에 이르러 근대신문에 대해 인식하고 주목하였다.
신문의 발행을 살펴보면, 일본은 1815년에 이미 외국인 발행의 한자신문을 들여다 번역하여 보고 있고 1865년에 일본계 미국인에 의해서 최초의 신문인 『海外新聞』이 만들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아편전쟁 시에 양광총독 임칙서가 영국인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외국신문을 변역케 한 적이 있었고, 일간지는 1858년에 만들어졌으며 1873년에는 民營의 일간신문도 창간되었다. 조선에서는 1896년 아펜셀러의 노력으로 근대 인쇄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1897년에 『조선그리스도인회보』, 1896년에 『독립신문』 등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에서의 근대 언론과 출판물이라는 정보유통체계는 하드웨어적인 것과 소프트웨어적인 것 모두 서양인의 개척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들에 의해서 신문이 먼저 발행되고 이것을 자국인이 모방하여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보유통체계는 지식체제의 하부구조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정보유통체계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언론출판물이 양과 질에서 앞섰던 순서로 동아시아에서의 근대화는 추진되었다. 이러한 것은 지식체제의 전달수단의 하나인 의무교육에서도 일본이 가장 앞섰다는 점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런 정보유통체계가 외국에 장악된 상황 속에서 '정보의 흐름에서 무역수지 적자'를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조로 인해 동아시아는 오리엔탈리즘, 동양학, 조선학이라는 자기들을 평가절하하는 이론들을 수용하여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8.15해방으로 救亡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일제의 잔재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또한 8.15 이후의 왜곡된 현대사는 계몽의 논리를 기형적으로 추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주로 일제에 협력하여 식민지적 근대화를 추구하던 사람들과 새로운 중심지식체제로 떠오른 미국지식체제에 관련된 사람들에 의해 '通辯文化'적인 수준으로 미국적 근대주의가 유입되기 시작함으로써 왜곡된 현대사의 흐름은 救亡과 계몽을 모두 복류적으로 흘러 오도록 했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의 근대를 파악할 때는 시대구분론, 단계론을 늘 따라다녔던 기존의 근대주의적 진화사관으로부터 떨어져 그 역사의 진행과 근대화를 자생적 근대와 외래적 근대를 나누어 고찰하되, 그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위 또는 의사종교적인 정치적 권위의 내면지배로부터의 이탈, 정치시스템으로서의 민중참여, 비계약적·고정적인 신분상하질서로부터의 해방, 민중의 경제활동의 기회균등화, 의료부조 등 생명보지의 수단과 교육의 기회균등화 등을 통해서 접근해야만
) 溝口雄三, 「中國における「封建」と近代」, 앞의 책, pp.117-122.
근대의 기획에 대해서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Ⅴ.맺음말
1870년 후기 이래 양무운동(양무론) 혹은 문명개화론을 목표로 하여 그것을 뒤따라 가려는 사상형태로서 개화사상이 형성되었으나, 진화론적인 약육강식, 우승열패적인 논리를 받아들여 외형적인 근대화에 치중했으므로 근대를 이룩한 기본정신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계기가 없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에 서구사조와 직접 접하면서 한국 지식체제는 중심지식체제로 등장하던 서구 지식체제와 직접적인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0년대를 경과하면서 계몽운동을 통해서 점차 서양근대의 기본가치로서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등의 정신을 이해·수용하게 되어 1880년대의 기술도입론에서 의회운동, 민권운동 등을 전개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서구 근대지식체제와의 교류가 시작된 이후 동양의 전통학문체제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서구 근대지식체제의 하위지식체제로 전락하였다. 그리하여 동양의 전통지식체제는 축소 내지는 소멸되었고 그 공백을 서구의 근대주의가 차지하였는데, 이윽고 이것이 확대재생산되어 동양의 전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중·일 간에도 서구 근대지식체제와의 관계는 각각 달랐다. 중국은 일본보다 먼저 광범위하게 서양 근대지식체제와 교류하였으나 이를 수용하기 위한 정치, 사회적 활동에서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어느 정도 수용 운동에서 성공하였던 일본을 통해서 서양 근대주의 문화를 받아 들이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도 결국 중국과 일본보다 늦게 새로운 세계지식체제의 중심지식체제인 서구 근대지식체제에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출판 및 교육제도라는 정보유통체제에 가장 뒤늦게 참여하게 되어 중국과 일본보다 더 주체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 왜곡된 정보유통구조속에서 '지식체제간의 무역수지'에서 수입이 너무 많아 문화·사상적으로 식민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청일전쟁 이후 한국의 전통지식체제는 일본의 근대지식체제에 의해 재편됨으로써 '세계지식체제의 변방인 동양의 중심지식체제로 기능하였던 일본지식체제의 하위지식체제'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합병이후에는 한국의 지식체제에 일본 근대지식체제에 의해 왜곡된 근대주의적 지식체제가 이식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구 근대지식체제가 만들어낸 근대주의라는 지식상품을 일본 근대지식체제가 왜곡하여 만들어 유통시킨 식민적 근대성이라는 형태로 재생산하여 유통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체제는 서구와 일본의 주변지식체제로 편입된 이후에는 지적의존성이 확대재생산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쉽게 극복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대해서 해방이후 폐쇄정책을 펴왔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일본을 경유하여 서구의 근대주의를 수입하는 루트는 끊이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구에서의 근대의 기획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재편하여 새로운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학문체계에서의 학문방법론과 知的生産性向上시스템을 다시 재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중심지식체제와 대응할 수 있는 하나의 지식체제로 존재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왜곡되어 잔존하고 있는 식민지성 근대화 논리의 폐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Y
신문의 발행을 살펴보면, 일본은 1815년에 이미 외국인 발행의 한자신문을 들여다 번역하여 보고 있고 1865년에 일본계 미국인에 의해서 최초의 신문인 『海外新聞』이 만들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아편전쟁 시에 양광총독 임칙서가 영국인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외국신문을 변역케 한 적이 있었고, 일간지는 1858년에 만들어졌으며 1873년에는 民營의 일간신문도 창간되었다. 조선에서는 1896년 아펜셀러의 노력으로 근대 인쇄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1897년에 『조선그리스도인회보』, 1896년에 『독립신문』 등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에서의 근대 언론과 출판물이라는 정보유통체계는 하드웨어적인 것과 소프트웨어적인 것 모두 서양인의 개척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들에 의해서 신문이 먼저 발행되고 이것을 자국인이 모방하여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보유통체계는 지식체제의 하부구조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정보유통체계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언론출판물이 양과 질에서 앞섰던 순서로 동아시아에서의 근대화는 추진되었다. 이러한 것은 지식체제의 전달수단의 하나인 의무교육에서도 일본이 가장 앞섰다는 점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런 정보유통체계가 외국에 장악된 상황 속에서 '정보의 흐름에서 무역수지 적자'를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조로 인해 동아시아는 오리엔탈리즘, 동양학, 조선학이라는 자기들을 평가절하하는 이론들을 수용하여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8.15해방으로 救亡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일제의 잔재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또한 8.15 이후의 왜곡된 현대사는 계몽의 논리를 기형적으로 추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주로 일제에 협력하여 식민지적 근대화를 추구하던 사람들과 새로운 중심지식체제로 떠오른 미국지식체제에 관련된 사람들에 의해 '通辯文化'적인 수준으로 미국적 근대주의가 유입되기 시작함으로써 왜곡된 현대사의 흐름은 救亡과 계몽을 모두 복류적으로 흘러 오도록 했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의 근대를 파악할 때는 시대구분론, 단계론을 늘 따라다녔던 기존의 근대주의적 진화사관으로부터 떨어져 그 역사의 진행과 근대화를 자생적 근대와 외래적 근대를 나누어 고찰하되, 그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위 또는 의사종교적인 정치적 권위의 내면지배로부터의 이탈, 정치시스템으로서의 민중참여, 비계약적·고정적인 신분상하질서로부터의 해방, 민중의 경제활동의 기회균등화, 의료부조 등 생명보지의 수단과 교육의 기회균등화 등을 통해서 접근해야만
) 溝口雄三, 「中國における「封建」と近代」, 앞의 책, pp.117-122.
근대의 기획에 대해서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Ⅴ.맺음말
1870년 후기 이래 양무운동(양무론) 혹은 문명개화론을 목표로 하여 그것을 뒤따라 가려는 사상형태로서 개화사상이 형성되었으나, 진화론적인 약육강식, 우승열패적인 논리를 받아들여 외형적인 근대화에 치중했으므로 근대를 이룩한 기본정신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계기가 없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에 서구사조와 직접 접하면서 한국 지식체제는 중심지식체제로 등장하던 서구 지식체제와 직접적인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0년대를 경과하면서 계몽운동을 통해서 점차 서양근대의 기본가치로서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등의 정신을 이해·수용하게 되어 1880년대의 기술도입론에서 의회운동, 민권운동 등을 전개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서구 근대지식체제와의 교류가 시작된 이후 동양의 전통학문체제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서구 근대지식체제의 하위지식체제로 전락하였다. 그리하여 동양의 전통지식체제는 축소 내지는 소멸되었고 그 공백을 서구의 근대주의가 차지하였는데, 이윽고 이것이 확대재생산되어 동양의 전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중·일 간에도 서구 근대지식체제와의 관계는 각각 달랐다. 중국은 일본보다 먼저 광범위하게 서양 근대지식체제와 교류하였으나 이를 수용하기 위한 정치, 사회적 활동에서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어느 정도 수용 운동에서 성공하였던 일본을 통해서 서양 근대주의 문화를 받아 들이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도 결국 중국과 일본보다 늦게 새로운 세계지식체제의 중심지식체제인 서구 근대지식체제에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출판 및 교육제도라는 정보유통체제에 가장 뒤늦게 참여하게 되어 중국과 일본보다 더 주체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더욱이 이 왜곡된 정보유통구조속에서 '지식체제간의 무역수지'에서 수입이 너무 많아 문화·사상적으로 식민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청일전쟁 이후 한국의 전통지식체제는 일본의 근대지식체제에 의해 재편됨으로써 '세계지식체제의 변방인 동양의 중심지식체제로 기능하였던 일본지식체제의 하위지식체제'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합병이후에는 한국의 지식체제에 일본 근대지식체제에 의해 왜곡된 근대주의적 지식체제가 이식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구 근대지식체제가 만들어낸 근대주의라는 지식상품을 일본 근대지식체제가 왜곡하여 만들어 유통시킨 식민적 근대성이라는 형태로 재생산하여 유통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체제는 서구와 일본의 주변지식체제로 편입된 이후에는 지적의존성이 확대재생산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쉽게 극복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대해서 해방이후 폐쇄정책을 펴왔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일본을 경유하여 서구의 근대주의를 수입하는 루트는 끊이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구에서의 근대의 기획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재편하여 새로운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학문체계에서의 학문방법론과 知的生産性向上시스템을 다시 재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중심지식체제와 대응할 수 있는 하나의 지식체제로 존재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왜곡되어 잔존하고 있는 식민지성 근대화 논리의 폐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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