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초기 비잔티움 국가발전의 기본 특징
1) 기독교화한 로마 제국
2) 민족 대 이동과 그리스도론 논쟁의 시대
3) 유스티니아누스의 복고작업과 그 와해
2. 비잔티움 국가의 생존투쟁과 쇄신(610-711)
1) 페르시아 전쟁 및 아바르 전쟁과 헤라클레이오스의 개혁작업
2) 아랍인들의 침략의 시대
3) 콘스탄티노플의 구출과 신질서의 완성
4) 헤라이클레이오스 왕조의 몰락
3. 성상 파괴 위기의 시대
1) 제위이 혼란
2) 성상 파괴와 아랍 전쟁: 레온 3세
3) 성상 파괴와 불가리아 전쟁: 콘스탄티노스 5세
4) 성상 파괴 운동의 후퇴와 성상 숭배의 재건
5) 비잔티움과 샤를마뉴
6) 니케포로스 1세의 개혁과 대외정치적 위험: 비잔티움과 크룸
7) 성상 파괴의 반동
4. 비잔티움 제국의 전성기(843~1025)
1) 새로운 시대의 시작
2) 법전 편찬의 시대: 바실레이오스 1세와 레온 6세
3) 비잔티움과 불가리아의 시메온
4) 봉건세력에 대한 중앙권력의 투쟁과 비잔티움 황실의 문화적
전성기: 로마노스 라카페노스와 콘스탄티노스 포르피로게네토스
5) 정복의 시대: 니케포로스 포카스와 요안네스 치미스케스
6) 비잔티움 세력의 절정: 바실레이오스 2세
5. 수도 관료귀족의 지배(1025~1081)
1) 중기 비잔티움 국가체제의 해체
2) 대내정치 및 대외정치의 쇠퇴
6. 군인귀족의 지배(1081~1204)
1) 비잔티움 제국의 재건: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2) 새로운 권력의 전개와 최초의 반격들: 요안네스 2세와 마누엘 1세
3) 안드로니코스 콤네노스의 부흥 시도
4) 붕괴
7. 라틴인들의 지배와 비잔티움 복구(1204~1282)
1) 새로운 국가체제의 형성
2) 에피로스의 흥망: 니카이아의 승리
3) 복구의 서곡
4) 강국 비잔티움의 재건: 미카엘 8세
8. 비잔티움 제국의 쇠망(1282~1453)
1) 소국으로의 비잔티움
2) 내전의 시대: 발칸에서 세르비아의 우세
3) 오스만인들의 발칸 반도 정복: 투르크의 가신국가로서의 비잔티움
4) 비잔티움의 멸망
1) 기독교화한 로마 제국
2) 민족 대 이동과 그리스도론 논쟁의 시대
3) 유스티니아누스의 복고작업과 그 와해
2. 비잔티움 국가의 생존투쟁과 쇄신(610-711)
1) 페르시아 전쟁 및 아바르 전쟁과 헤라클레이오스의 개혁작업
2) 아랍인들의 침략의 시대
3) 콘스탄티노플의 구출과 신질서의 완성
4) 헤라이클레이오스 왕조의 몰락
3. 성상 파괴 위기의 시대
1) 제위이 혼란
2) 성상 파괴와 아랍 전쟁: 레온 3세
3) 성상 파괴와 불가리아 전쟁: 콘스탄티노스 5세
4) 성상 파괴 운동의 후퇴와 성상 숭배의 재건
5) 비잔티움과 샤를마뉴
6) 니케포로스 1세의 개혁과 대외정치적 위험: 비잔티움과 크룸
7) 성상 파괴의 반동
4. 비잔티움 제국의 전성기(843~1025)
1) 새로운 시대의 시작
2) 법전 편찬의 시대: 바실레이오스 1세와 레온 6세
3) 비잔티움과 불가리아의 시메온
4) 봉건세력에 대한 중앙권력의 투쟁과 비잔티움 황실의 문화적
전성기: 로마노스 라카페노스와 콘스탄티노스 포르피로게네토스
5) 정복의 시대: 니케포로스 포카스와 요안네스 치미스케스
6) 비잔티움 세력의 절정: 바실레이오스 2세
5. 수도 관료귀족의 지배(1025~1081)
1) 중기 비잔티움 국가체제의 해체
2) 대내정치 및 대외정치의 쇠퇴
6. 군인귀족의 지배(1081~1204)
1) 비잔티움 제국의 재건: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2) 새로운 권력의 전개와 최초의 반격들: 요안네스 2세와 마누엘 1세
3) 안드로니코스 콤네노스의 부흥 시도
4) 붕괴
7. 라틴인들의 지배와 비잔티움 복구(1204~1282)
1) 새로운 국가체제의 형성
2) 에피로스의 흥망: 니카이아의 승리
3) 복구의 서곡
4) 강국 비잔티움의 재건: 미카엘 8세
8. 비잔티움 제국의 쇠망(1282~1453)
1) 소국으로의 비잔티움
2) 내전의 시대: 발칸에서 세르비아의 우세
3) 오스만인들의 발칸 반도 정복: 투르크의 가신국가로서의 비잔티움
4) 비잔티움의 멸망
본문내용
배하는 현재의 서양세계에서 다소 이질적인 그리스문화를 계승하고 독특한 그리스정교문화를 꽃 피워왔던 이들은 동질감을 가지는 역사라기보다는 이교도의 역사로 치부되어 왔다. 이는 중국의 시각에서 바라 본 거란이나 만주족의 역사와 같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기억되는 비잔티움의 역사는 그 멸망과 함께 동유럽의 오스만투르크 진출을 가속시켰다는 것, 러시아에 그리스 정교을 전했다는 것과 망명한 학자들에 의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촉발되었다는 정도의 몇몇 이야기들이다. 물론 비잔티움 사회가 그 당시 서유럽과는 크게 다른 동방제국과 유사했고 이것이 낙후성의 증거로 보여 졌던 점도 있겠다. 그러나 1,000년을 이어 존재했던 국가는 그 존재가치가 있음이 틀림없고 비록 이슬람의 질풍노도와도 같은 도전으로 마지막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위기의 순간에서도 이를 대체하는 신세력이 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비잔티움의 숨은 저력을 말해준다 하겠다. 아마도 이 책은 기존의 서양사관에 기초하지 않고 비잔티움의 계승자의 시각에서 충실하게 쓰여 진 많지 않은 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비잔티움의 역사가 그저 처절하게 패망한 패자의 역사가 아니라는 저자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패자의 마지막이 처절함은 있으나 화려함이 없음은 당연하다. 비잔티움 역시 그 마지막은 처절했으나 그 마지막이 전부임이 아님을 이 책을 말하고 있다.
Ⅵ. 비잔티움 제국사 서평
로마제국의 한 새로운 시대에 불과했던 비잔티움이 고대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기독교 신앙을 발판으로 삼아 독자적인 비잔티움 국가체로 발전해나간 과정을 조명했다. 저자는 노예제가 아니라 소농민의 상대적 안정에 바탕을 둔 사회체제 덕분에 비잔티움이 나름대로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1천년이상 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석했다. 마케도니아 왕조 치하에서 잘 기능했던 테마제도와 소농보호가 비잔티움이 서유럽과 인근 소국들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차자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는 것이다.
비잔티움 사회가 봉건화되기 시작하면서 제국의 몰락이 시작된 것으로 본 저자는 신흥 오스만의 세력 때문에 천년을 이어오던 대제국이 갑자기 몰락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국가체제가 해체되고 경제기반이 무너지는 쇠망의 과정이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회사에 정통한 저자는 비잔티움 역사서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상 논쟁과 헤시카슴 논쟁, 동서 교회 통합논쟁 등 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각 시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비잔티움사는 홀대받은 역사로, 서로마를 모태로 한 서유럽인의 대결의식이 비잔티움 문명을 의식적으로 낮게 평가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대결의식의 큰 뿌리는 서로마 제국의 종교가 로마 가톨릭인 반면 비잔티움은 그리스 정교였다는 데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 터키 지역을 중심으로 324~1453년까지 존속했던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문화권. 특히 계몽사상시대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흥망사' 에서 동로마 제국을 쇠퇴와 타락의 역사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의 이런 의식이 서유럽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흐름 탓에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에서 열등한 제국, 저제국(低帝國. le Bas-Empire) 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수모를 당한다. 서구의 역사연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국내에서도 비잔티움 역사 연구는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다. 대학의 강좌는 물론 역사서를 찾기도 어렵다. 대학에서는 비잔티움 역사연구의 지원자조차 찾기 힘들다고 한다.
비잔티움 역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서로마 제국의 후손들이 유럽 여러 국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오스만 투르크족에 멸망당한 비잔티움은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그 실체조차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한 세력이 면면히 이어지지 못할 때 역사조차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비정함이 읽혀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제대로 평가받아할 역사가 폄하되는 것은 올바른 역사인식을 얻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1902~76)의 '비잔티움 제국사' (한정숙, 김경연 옮김. 까치)가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20세기 비잔티움 역사연구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유고 역사학자 오스트로고르스키의 이 저서는 국내에서 비잔티움 역사를 체계적으로 통찰하고 있는 첫 단행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본다. 또 비잔티움이 고대 로마의 행정, 그리스의 문화, 기독교 신앙을 발판삼아 어떻게 독자적인 국가체제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융성의 시기를 지나 천년 이상을 지속한 제국이 어떻게 비극적으로 몰락해갔는지를 꼼꼼하게 그려낸다. 저자가 비잔티움의 역사에서 강조하는 세계사적 의의는 크게 두 가지다.
저자가 비잔티움의 역사에서 강조하는 세계사적 의의는 크게 두 가지다. 고대의 문화를 보존해 이를 서유럽에 전해주었다는 점과 그리스 정교의 정신적 유산을 슬라브세계(러시아)가 계승토록 했다는 것. 서로마제국에 비해 뒤지지 않는 그리스. 라틴어 저작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로마법 대전' 그리고 세계 건축사에서 뛰어난 건축물인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이 문화 전수의 대표적인 예다.
비잔티움의 그리스 정교를 전해 받은 러시아인들이 모스크바는 콘스탄티노플에 이은 '제3의 로마' 라고 여기는 선민의식은 비잔티움의 문명사적. 정신사적 산물로 결코 서로마 역사에 비해 뒤질 것이 없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이 책에서 독일에서 활동한 사학자답게 탄탄한 실증사학을 토대로 비잔티움의 역사를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세계사적 의의를 규명하는데 힘쓰고 있다. 또 비잔티움이 고대 로마의 행정, 그리스의 문화, 기독교 신앙을 발판삼아 어떻게 독자적인 국가체제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융성의 시기를 지나 천년 이상을 지속한 제국이 어떻게 비극적으로 몰락해갔는지를 꼼꼼하게 그려낸다.
그간 비잔티움은 역사의 불모지였고 관심 밖의 대상이었던 탓에 알고자 해도 마땅한 자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도 이 책은 기존의 서양사관에 기초하지 않고 비잔티움의 계승자의 시각에서 충실하게 쓰여 진 많지 않은 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Ⅵ. 비잔티움 제국사 서평
로마제국의 한 새로운 시대에 불과했던 비잔티움이 고대 로마의 국가제도와 그리스 문화, 기독교 신앙을 발판으로 삼아 독자적인 비잔티움 국가체로 발전해나간 과정을 조명했다. 저자는 노예제가 아니라 소농민의 상대적 안정에 바탕을 둔 사회체제 덕분에 비잔티움이 나름대로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1천년이상 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석했다. 마케도니아 왕조 치하에서 잘 기능했던 테마제도와 소농보호가 비잔티움이 서유럽과 인근 소국들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차자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는 것이다.
비잔티움 사회가 봉건화되기 시작하면서 제국의 몰락이 시작된 것으로 본 저자는 신흥 오스만의 세력 때문에 천년을 이어오던 대제국이 갑자기 몰락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국가체제가 해체되고 경제기반이 무너지는 쇠망의 과정이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회사에 정통한 저자는 비잔티움 역사서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상 논쟁과 헤시카슴 논쟁, 동서 교회 통합논쟁 등 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각 시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비잔티움사는 홀대받은 역사로, 서로마를 모태로 한 서유럽인의 대결의식이 비잔티움 문명을 의식적으로 낮게 평가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대결의식의 큰 뿌리는 서로마 제국의 종교가 로마 가톨릭인 반면 비잔티움은 그리스 정교였다는 데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 터키 지역을 중심으로 324~1453년까지 존속했던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문화권. 특히 계몽사상시대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흥망사' 에서 동로마 제국을 쇠퇴와 타락의 역사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의 이런 의식이 서유럽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흐름 탓에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에서 열등한 제국, 저제국(低帝國. le Bas-Empire) 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수모를 당한다. 서구의 역사연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국내에서도 비잔티움 역사 연구는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다. 대학의 강좌는 물론 역사서를 찾기도 어렵다. 대학에서는 비잔티움 역사연구의 지원자조차 찾기 힘들다고 한다.
비잔티움 역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서로마 제국의 후손들이 유럽 여러 국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오스만 투르크족에 멸망당한 비잔티움은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그 실체조차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한 세력이 면면히 이어지지 못할 때 역사조차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비정함이 읽혀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제대로 평가받아할 역사가 폄하되는 것은 올바른 역사인식을 얻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1902~76)의 '비잔티움 제국사' (한정숙, 김경연 옮김. 까치)가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20세기 비잔티움 역사연구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유고 역사학자 오스트로고르스키의 이 저서는 국내에서 비잔티움 역사를 체계적으로 통찰하고 있는 첫 단행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본다. 또 비잔티움이 고대 로마의 행정, 그리스의 문화, 기독교 신앙을 발판삼아 어떻게 독자적인 국가체제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융성의 시기를 지나 천년 이상을 지속한 제국이 어떻게 비극적으로 몰락해갔는지를 꼼꼼하게 그려낸다. 저자가 비잔티움의 역사에서 강조하는 세계사적 의의는 크게 두 가지다.
저자가 비잔티움의 역사에서 강조하는 세계사적 의의는 크게 두 가지다. 고대의 문화를 보존해 이를 서유럽에 전해주었다는 점과 그리스 정교의 정신적 유산을 슬라브세계(러시아)가 계승토록 했다는 것. 서로마제국에 비해 뒤지지 않는 그리스. 라틴어 저작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로마법 대전' 그리고 세계 건축사에서 뛰어난 건축물인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이 문화 전수의 대표적인 예다.
비잔티움의 그리스 정교를 전해 받은 러시아인들이 모스크바는 콘스탄티노플에 이은 '제3의 로마' 라고 여기는 선민의식은 비잔티움의 문명사적. 정신사적 산물로 결코 서로마 역사에 비해 뒤질 것이 없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이 책에서 독일에서 활동한 사학자답게 탄탄한 실증사학을 토대로 비잔티움의 역사를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하면서 세계사적 의의를 규명하는데 힘쓰고 있다. 또 비잔티움이 고대 로마의 행정, 그리스의 문화, 기독교 신앙을 발판삼아 어떻게 독자적인 국가체제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융성의 시기를 지나 천년 이상을 지속한 제국이 어떻게 비극적으로 몰락해갔는지를 꼼꼼하게 그려낸다.
그간 비잔티움은 역사의 불모지였고 관심 밖의 대상이었던 탓에 알고자 해도 마땅한 자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도 이 책은 기존의 서양사관에 기초하지 않고 비잔티움의 계승자의 시각에서 충실하게 쓰여 진 많지 않은 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