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0. 들어가며
1. 식민주의를 보는 다양한 시각
(1) 민족주의적 시각
(2) 문화제국주의
(3) 탈식민주의의 관점
(4) 파농의 탈식민주의
2. 식민성의 극복을 위하여
3. 나가며
1. 식민주의를 보는 다양한 시각
(1) 민족주의적 시각
(2) 문화제국주의
(3) 탈식민주의의 관점
(4) 파농의 탈식민주의
2. 식민성의 극복을 위하여
3. 나가며
본문내용
즉 탈분단, 나아가 평화적 통일의 달성이라는 근대기획의 완성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지고 있는 상황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한국의 경우 식민지 이후=탈식민지가 아니라, 팽창된 미군기지의 존재나 영공의 관제권을 단적인 근거로 들면서 오늘날을 미국 지배하의 ‘신식민지’로 규정하기도 한다. 강상중, 앞의 책, p.156
비서양인 아시아에 있어서 문화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근대를 극복한다는 것은 서양적 근대를 뒤쫓아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탈식민지화는 신식민지적 상황하의 사람들이 식민지의 과거와 그로부터 발생한 문제를 극복하고, 과거의 잔재 및 흔적이 방해해온 역사적 발전을 달성하는 작업이라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성격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적 관점은 무엇인가? 솔직한 이야기로, 그것을 찾아내고 제시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우리의 능력 밖에 일일른지도 모른다. 이는, 식민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가치관 자체가 이미 식민성에 젖어버린 이유에 크게 기인한다.
그럼에도, 탈식민주의를 바라봄에 늘 식민지배의 가해자, 내지는 비당사자의 입장과 시각을 가져온다는 것은 또 하나의 지적인 식민성에 감염되는 길일 것이다.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선, 식민화의 내부적 과정을 직시할 수 있는, 일방적으로 강요되어 규정화된 가치의 재정립을 향한 해방의 의미와 규정화된 정체성에 대한 거부의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우리의 관점과 이해가 필요하다.
식민주의적인 지배 속에 놓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것은 우리의 '동의'다. 즉, 실제로 식민주의는 '식민화'를 경험하는 나라의 민중, 인민들의 내부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어느 만치의 동의 속에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좀더 깊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식민주의를 식민화과정속에서의 일방적인 식민지배세력의 의도와 작용에만 국한시켜 비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과 가치관을 먼저 경계하고, 점검해야 한다. 놓은 선들의 극복을 이야기함에 앞서 이미 내면화된 시각의 치유와 전복이 중요하다는 파농의 이야기는 여기서 의미를 갖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앞서 이야기했듯 문화의 공존과 주입이 아닌 생산의 목소리, 생산의 문화들을 만들어가야 한다. 즉, 문화의 세계화가 진보적이냐 반동적이냐의 논의보다는 그러한 과정이 누구의 통제하에서 이루어지는가에 주목해야하며, 그 통제를 진정 ‘우리’의 통제하에 생산적이고 해방적인 가치로 안아오기위해 문화민주주의의 확대라는 기획을 설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대안 주체로서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서의 민족을 상정하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공유해내는 작용과 의미들, 그것속에서 우리라는 틀은 비로소 존재한다. 우리라는 상정된 개념속에서 이끌어내는 무인가에 대한 기대는 대개는 반동의 실험으로 그치고 말기 십상이다.
구체적인 형태로, 주체적인 수용과 비판적인, 능동적인 문화의 공유를 위한 특별한 장들을 마련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이곳에서 생산하는, 생산되는 다양하고, 비획일적인 문화들이 실제로 우리가 주입된 질서로서 우리의 삶을 수동화, 획일화시키는 식민성에 대한 지양,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생산적인 문화, 사회, 소통체계들을 지향하는 문제와 떨어질 수 없음을 우리는 본다.
3. 나가며
우리는 지금까지 문화적 영역속의 식민성을 고찰했다.
뜬금없는 얘기를 해보자면, 세계를 문화적인 틀로써 이해하고 분석한다는게 참 어렵고 모호한 일임을 절감한다.
우리는 문화담론의 과잉 속에 살고 있다. 문화는, 어디를 가든 접하게 되는 용어이자 어떻게든 만나고 취하게 되는 일상의 영역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모두가 나름의 문화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항유하고 있고, 그들이 모여 일련의 조합과 현상들을 만들어낸다. 취향의 다원화, 흔히 들을 수 있는 현대사회의 현상적 특징이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이 가지는 의미들은 보이는 만큼 그렇게 ‘쿨’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우리의 취향들은 어느만큼 일방적인 담론속에, 획일적인 소비의 형태로만 구성된다. 취향의 ‘구성’. 상품화라는 딱지를 붙이고서만 문화라고 이름지어질 수 있는 이 거대한 틀. 어떻게 보면 본다면 문화 담론의 과잉 속에, 정작 ‘문화’는 없다.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으레 붕뜬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거기에서 본다. 취향의 구성은 참으로 구조적으로, 전사회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반면, 그러한 취향의 발현은 내면적인 형태로, 아주 은밀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그 문화영역들이 무엇인지, 그것의 동학과 전 사회 속에서의 역학관계를 사회학적으로 고찰하는 과정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떻게든 은폐된다. ‘나는 단지 그게 좋아. 거기에 대해서 나는 결코 침해받고 싶지 않아.’ 얼마나 이 말을 많이 해왔는지, 얼마나 이 말을 많이 들어왔는지, 우리는 기억할 수도 없다.
살펴보았듯이 취향 속에 실제 독립된 취향이란 것은 존재하기 힘들다. 식민성은 일상적 영역속에서 기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밀하게 각자의 삶 속에 분절되어있지만, 역으로 그 삶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편린들을 읽어내고 우리 스스로부터 그것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 그것이 문화를 긍정적인 의미로 고찰해내는데, 우리의 주제였던 문화적 식민성의 문제를 꺼내어 극복하는데 가장 중요한 과정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일상의 영역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사회적 관계들과 맞물려 이해되어야 하고, 그속에서 좀더 우리는 해방적인 질서를 안아오는 모색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상은 사회와 분리되어 있지않고, 문화는 다른 영역들과 분리되어 사고될 수 없다.
맺어보자면, 서구에서 옷 것들이 지금 우리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 얼마만큼 우리 삶을 풍요롭게 했는지를 지금 시점에서 차분히 살펴보는 과정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풍요로움 보다는 소외를 가져오는 것이었다면, 삶의 획일화를 넘어서는 조건의 일례로서 식민주의 극복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제기해야하고, 그 강요된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 오늘, 여기, 우리의 삶과 목소리를 주목하고, 다양한 영역속의 실험과 반항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서양인 아시아에 있어서 문화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근대를 극복한다는 것은 서양적 근대를 뒤쫓아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탈식민지화는 신식민지적 상황하의 사람들이 식민지의 과거와 그로부터 발생한 문제를 극복하고, 과거의 잔재 및 흔적이 방해해온 역사적 발전을 달성하는 작업이라 본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성격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적 관점은 무엇인가? 솔직한 이야기로, 그것을 찾아내고 제시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우리의 능력 밖에 일일른지도 모른다. 이는, 식민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가치관 자체가 이미 식민성에 젖어버린 이유에 크게 기인한다.
그럼에도, 탈식민주의를 바라봄에 늘 식민지배의 가해자, 내지는 비당사자의 입장과 시각을 가져온다는 것은 또 하나의 지적인 식민성에 감염되는 길일 것이다.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선, 식민화의 내부적 과정을 직시할 수 있는, 일방적으로 강요되어 규정화된 가치의 재정립을 향한 해방의 의미와 규정화된 정체성에 대한 거부의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우리의 관점과 이해가 필요하다.
식민주의적인 지배 속에 놓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것은 우리의 '동의'다. 즉, 실제로 식민주의는 '식민화'를 경험하는 나라의 민중, 인민들의 내부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어느 만치의 동의 속에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좀더 깊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식민주의를 식민화과정속에서의 일방적인 식민지배세력의 의도와 작용에만 국한시켜 비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과 가치관을 먼저 경계하고, 점검해야 한다. 놓은 선들의 극복을 이야기함에 앞서 이미 내면화된 시각의 치유와 전복이 중요하다는 파농의 이야기는 여기서 의미를 갖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앞서 이야기했듯 문화의 공존과 주입이 아닌 생산의 목소리, 생산의 문화들을 만들어가야 한다. 즉, 문화의 세계화가 진보적이냐 반동적이냐의 논의보다는 그러한 과정이 누구의 통제하에서 이루어지는가에 주목해야하며, 그 통제를 진정 ‘우리’의 통제하에 생산적이고 해방적인 가치로 안아오기위해 문화민주주의의 확대라는 기획을 설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대안 주체로서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서의 민족을 상정하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공유해내는 작용과 의미들, 그것속에서 우리라는 틀은 비로소 존재한다. 우리라는 상정된 개념속에서 이끌어내는 무인가에 대한 기대는 대개는 반동의 실험으로 그치고 말기 십상이다.
구체적인 형태로, 주체적인 수용과 비판적인, 능동적인 문화의 공유를 위한 특별한 장들을 마련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이곳에서 생산하는, 생산되는 다양하고, 비획일적인 문화들이 실제로 우리가 주입된 질서로서 우리의 삶을 수동화, 획일화시키는 식민성에 대한 지양,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생산적인 문화, 사회, 소통체계들을 지향하는 문제와 떨어질 수 없음을 우리는 본다.
3. 나가며
우리는 지금까지 문화적 영역속의 식민성을 고찰했다.
뜬금없는 얘기를 해보자면, 세계를 문화적인 틀로써 이해하고 분석한다는게 참 어렵고 모호한 일임을 절감한다.
우리는 문화담론의 과잉 속에 살고 있다. 문화는, 어디를 가든 접하게 되는 용어이자 어떻게든 만나고 취하게 되는 일상의 영역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모두가 나름의 문화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항유하고 있고, 그들이 모여 일련의 조합과 현상들을 만들어낸다. 취향의 다원화, 흔히 들을 수 있는 현대사회의 현상적 특징이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이 가지는 의미들은 보이는 만큼 그렇게 ‘쿨’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우리의 취향들은 어느만큼 일방적인 담론속에, 획일적인 소비의 형태로만 구성된다. 취향의 ‘구성’. 상품화라는 딱지를 붙이고서만 문화라고 이름지어질 수 있는 이 거대한 틀. 어떻게 보면 본다면 문화 담론의 과잉 속에, 정작 ‘문화’는 없다.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으레 붕뜬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거기에서 본다. 취향의 구성은 참으로 구조적으로, 전사회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반면, 그러한 취향의 발현은 내면적인 형태로, 아주 은밀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그 문화영역들이 무엇인지, 그것의 동학과 전 사회 속에서의 역학관계를 사회학적으로 고찰하는 과정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떻게든 은폐된다. ‘나는 단지 그게 좋아. 거기에 대해서 나는 결코 침해받고 싶지 않아.’ 얼마나 이 말을 많이 해왔는지, 얼마나 이 말을 많이 들어왔는지, 우리는 기억할 수도 없다.
살펴보았듯이 취향 속에 실제 독립된 취향이란 것은 존재하기 힘들다. 식민성은 일상적 영역속에서 기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밀하게 각자의 삶 속에 분절되어있지만, 역으로 그 삶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편린들을 읽어내고 우리 스스로부터 그것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 그것이 문화를 긍정적인 의미로 고찰해내는데, 우리의 주제였던 문화적 식민성의 문제를 꺼내어 극복하는데 가장 중요한 과정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일상의 영역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사회적 관계들과 맞물려 이해되어야 하고, 그속에서 좀더 우리는 해방적인 질서를 안아오는 모색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상은 사회와 분리되어 있지않고, 문화는 다른 영역들과 분리되어 사고될 수 없다.
맺어보자면, 서구에서 옷 것들이 지금 우리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 얼마만큼 우리 삶을 풍요롭게 했는지를 지금 시점에서 차분히 살펴보는 과정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풍요로움 보다는 소외를 가져오는 것이었다면, 삶의 획일화를 넘어서는 조건의 일례로서 식민주의 극복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제기해야하고, 그 강요된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 오늘, 여기, 우리의 삶과 목소리를 주목하고, 다양한 영역속의 실험과 반항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