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서 지금까지 쌓아올린 그의 모든 학문적 성과들을 총망라하는 작업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한 작년 9월 30일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앞으로 4년, 4개월, 4일, 4시간 후에,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1997년 2월 3일 네 시에, 자신의 세번 째 소설을 발표할 것이라고 장담하였는데, 앞의 두 소설에 대한 전세계의 반응과 성과로 미루어볼 때, 세번 째의 소설 역시 기대해볼 만하리라.
금욕생활이 초래한 변태적 행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제한하는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된다. 그중 "장미의 이름으로"에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큰 힘인 "성의 욕구"라는 것의 억제를 통한 깨달음 - 즉 수도생활을 가용하는 데서 엿볼수 있다.
금욕생활 속에서의 자신의 절제와 이기적인 욕망의 변화, 절대적 진리에 따른 고행 속에서의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방황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물론 금욕생활을 통해서 자기 성찰과 진리탐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표출하지 못하는 경우, 그 반응들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중 소위 변태적이라 하는 비정상적 행위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 생각되어진다.
즉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금기시킴으로써 그에 반향하여 나타나는 욕구 충족의 한 형태인 것이다.
그의 예로서 동성애가 있을 수 있다.
여자를 사악한 동물로 보아 가까이 하는 것도 금기시하는 수도생활속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 어찌보면 그저 욕망의 충족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 같은 성(性)의 남자를 상대로 삼아 표출하는 남색의 경우이다.
물론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는 것 뿐이다.
이걸 "죄"라는 굴레에 씌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사랑일 경우에는 말이다. 그러나 그 동성애가 그저 한 순간의 욕망의 탈출의 요구로 여겨질 때, 그리고 그렇게 사용될 때, 동성애는 아름답거나 혹은 애처로운 사랑의 한 종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수도원에서의 비정상적인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극단적인 고행을 통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갈등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서도 이런 예는 보여진다.
비종교적이지만, 남색의 예를 들자면 남사당패가 있고, 종교적인 예이지만, 이성간의 잘못된 성관 계를 논하자면 불당의 스님들을 그 예로 들어볼 수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남사당패에는 여인네가 들어올 수 없다는 rule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남사당들은 어리고 귀여운 남아에게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굴레를 씌워 돈을 받고 변형된 성관계를 강요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아이를 갖기 못했던 부인네들이 최후의 선택으로 불공드리러 절에 가서 아이가 생기기를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와 같은 때에 스님들과의 잘못된 관계로 인한 임신도 있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보여지는 예들을 통해서, 비정상적으로 표현되는 이런 성적인 요구가 나타날때까지의 금욕이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어 졌다.
성(性)이라는 것은 두 성(性)의 조화로 인해 아름다워 질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영화의 배경이 수도원이었으니깐- 종족번식을 거부한 이가 벼락을 맞기도 하였고(오난), 남자의 신체 일부분으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서술되어있다. 자제해야 하는 힘은 중요하다. 특히 수도원에서 자기절제와 고행을 통한 절대 진리의 탐구는 모든 수도자들의 가치중 어느 것보다 우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수도자라는 길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 경우에 사람의 가치는 엉망이되고 방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탑의 침묵
탑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며 느껴지는 파장은 다시금 우리를 뒤돌아 보게 한다. 침울하고 암담하게 다가오는 탑의 기괴함은 무엇인가 말을 해줄듯하는데.......
하지말라하면 더 하고픈 욕망을 반영하듯 탑으로 향하는 길을 이정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서 들어가고야만다. 이런 무언가를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내면의 Black box(즉, 드러내보이고 싶지 않거나 자신의 모순을 감추려하는)를 숨기려는 욕망이 충돌하는 곳, 그곳을 탑 - 너무나도 복잡한 미로로 구성된 - 이 선정된 것이다. 원로신부의 편협된 사고를 비판한다거나 Willam신부의 영웅적인 면모를 치하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충돌을 내보이는 그들을 파헤쳐 보고자함이다.
Willam이란 말은 '용맹한자', '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는자' 등으로 이해되고 영어 단어의 'Will'은 인간의 의지등으로 표상한다. 이런 의미를 띄는 Willam은 사건의 해결을 위해 파견된 인간의 내면을 파헤쳐보고자 생각하고 의문을 품는 인간형이다.
반면, 원로신부님에대한 성격묘사가 없었으나, 간접적으로 교회의 권위, 즉 그가 세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고수하고 일반 신부들 또는 수습 신부들에게까지 지켜지도록 명령하는 권위적 인간형이자,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집단이 주장하는 정신에 위배되는 부분에 의해 집단의 분산과 그의 권위를 잃지 않으려 은폐하는 폐쇄적인 인간형이다.
이들의 알고자하는 욕망과 은폐시키려함은 사건을 일으키고 해결하려는 그들의 행위로 드러난다.
탑안에서의 원로신부의 행각은 호기심많은 수습신부들의 죽음으로 드러난다. 원로신부의 이런 극단적인 은폐적 욕망으로 말미암아 더욱 Willam과의 대립은 치밀해진다.
그들 욕망의 대립은 마치 오이디푸스王 이야기에서 나타나듯 오이디푸스의 아버지가 그의 권력과 그에게 닥칠 화를 피하기 위해 살인을 음모하나 도리어 자기가 화를 입고 아들에게도 평생짊어질 죄책감을 안겨주었듯이 서로에게 뿐만아니라 후대에게 기리 남을 만한 장서를 태움으로써 엄청난 불행의 씨앗을 유발시킨다. 이것이 영화에서는 두 인간으로 표상되었지만 실지로는 인간의 내부에서 충돌되는 욕망들인 것이다. 밝혀내려는 욕망과 결국에는 은폐시키려는 마음으로 인한 발전과 갈등으로 인간의 본능에서 이성으로 자리잡아감을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탑이 불에 타는 것으로 싸움은 일단락되었지만 탑에 소장된 책을 지적 욕망으로 몇권 가지고 나옴으로써 지속되는 호기심과 은폐성은 영원히 충돌하게 될 것이다.
금욕생활이 초래한 변태적 행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제한하는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된다. 그중 "장미의 이름으로"에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큰 힘인 "성의 욕구"라는 것의 억제를 통한 깨달음 - 즉 수도생활을 가용하는 데서 엿볼수 있다.
금욕생활 속에서의 자신의 절제와 이기적인 욕망의 변화, 절대적 진리에 따른 고행 속에서의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방황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물론 금욕생활을 통해서 자기 성찰과 진리탐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표출하지 못하는 경우, 그 반응들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중 소위 변태적이라 하는 비정상적 행위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 생각되어진다.
즉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금기시킴으로써 그에 반향하여 나타나는 욕구 충족의 한 형태인 것이다.
그의 예로서 동성애가 있을 수 있다.
여자를 사악한 동물로 보아 가까이 하는 것도 금기시하는 수도생활속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 어찌보면 그저 욕망의 충족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 같은 성(性)의 남자를 상대로 삼아 표출하는 남색의 경우이다.
물론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는 것 뿐이다.
이걸 "죄"라는 굴레에 씌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사랑일 경우에는 말이다. 그러나 그 동성애가 그저 한 순간의 욕망의 탈출의 요구로 여겨질 때, 그리고 그렇게 사용될 때, 동성애는 아름답거나 혹은 애처로운 사랑의 한 종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수도원에서의 비정상적인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극단적인 고행을 통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갈등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서도 이런 예는 보여진다.
비종교적이지만, 남색의 예를 들자면 남사당패가 있고, 종교적인 예이지만, 이성간의 잘못된 성관 계를 논하자면 불당의 스님들을 그 예로 들어볼 수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남사당패에는 여인네가 들어올 수 없다는 rule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남사당들은 어리고 귀여운 남아에게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굴레를 씌워 돈을 받고 변형된 성관계를 강요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아이를 갖기 못했던 부인네들이 최후의 선택으로 불공드리러 절에 가서 아이가 생기기를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와 같은 때에 스님들과의 잘못된 관계로 인한 임신도 있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보여지는 예들을 통해서, 비정상적으로 표현되는 이런 성적인 요구가 나타날때까지의 금욕이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어 졌다.
성(性)이라는 것은 두 성(性)의 조화로 인해 아름다워 질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영화의 배경이 수도원이었으니깐- 종족번식을 거부한 이가 벼락을 맞기도 하였고(오난), 남자의 신체 일부분으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서술되어있다. 자제해야 하는 힘은 중요하다. 특히 수도원에서 자기절제와 고행을 통한 절대 진리의 탐구는 모든 수도자들의 가치중 어느 것보다 우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수도자라는 길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 경우에 사람의 가치는 엉망이되고 방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탑의 침묵
탑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며 느껴지는 파장은 다시금 우리를 뒤돌아 보게 한다. 침울하고 암담하게 다가오는 탑의 기괴함은 무엇인가 말을 해줄듯하는데.......
하지말라하면 더 하고픈 욕망을 반영하듯 탑으로 향하는 길을 이정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서 들어가고야만다. 이런 무언가를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내면의 Black box(즉, 드러내보이고 싶지 않거나 자신의 모순을 감추려하는)를 숨기려는 욕망이 충돌하는 곳, 그곳을 탑 - 너무나도 복잡한 미로로 구성된 - 이 선정된 것이다. 원로신부의 편협된 사고를 비판한다거나 Willam신부의 영웅적인 면모를 치하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충돌을 내보이는 그들을 파헤쳐 보고자함이다.
Willam이란 말은 '용맹한자', '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는자' 등으로 이해되고 영어 단어의 'Will'은 인간의 의지등으로 표상한다. 이런 의미를 띄는 Willam은 사건의 해결을 위해 파견된 인간의 내면을 파헤쳐보고자 생각하고 의문을 품는 인간형이다.
반면, 원로신부님에대한 성격묘사가 없었으나, 간접적으로 교회의 권위, 즉 그가 세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고수하고 일반 신부들 또는 수습 신부들에게까지 지켜지도록 명령하는 권위적 인간형이자,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집단이 주장하는 정신에 위배되는 부분에 의해 집단의 분산과 그의 권위를 잃지 않으려 은폐하는 폐쇄적인 인간형이다.
이들의 알고자하는 욕망과 은폐시키려함은 사건을 일으키고 해결하려는 그들의 행위로 드러난다.
탑안에서의 원로신부의 행각은 호기심많은 수습신부들의 죽음으로 드러난다. 원로신부의 이런 극단적인 은폐적 욕망으로 말미암아 더욱 Willam과의 대립은 치밀해진다.
그들 욕망의 대립은 마치 오이디푸스王 이야기에서 나타나듯 오이디푸스의 아버지가 그의 권력과 그에게 닥칠 화를 피하기 위해 살인을 음모하나 도리어 자기가 화를 입고 아들에게도 평생짊어질 죄책감을 안겨주었듯이 서로에게 뿐만아니라 후대에게 기리 남을 만한 장서를 태움으로써 엄청난 불행의 씨앗을 유발시킨다. 이것이 영화에서는 두 인간으로 표상되었지만 실지로는 인간의 내부에서 충돌되는 욕망들인 것이다. 밝혀내려는 욕망과 결국에는 은폐시키려는 마음으로 인한 발전과 갈등으로 인간의 본능에서 이성으로 자리잡아감을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탑이 불에 타는 것으로 싸움은 일단락되었지만 탑에 소장된 책을 지적 욕망으로 몇권 가지고 나옴으로써 지속되는 호기심과 은폐성은 영원히 충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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