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단군신화
2. 고조선의 위치와 존속 시기
3. 고조선의 사회적 성격
4. 기자와 위만
5.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2. 고조선의 위치와 존속 시기
3. 고조선의 사회적 성격
4. 기자와 위만
5.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본문내용
데 사용되었던 봉니 등이 중국 내에서도 출토되어 이 지역에서 다수 나왔던 군현관료들의 봉니 도장 글의 역사적 신빙성이 거의 확실해진 만큼 한의 군현이 이곳에 설치된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 낙랑군, 현도군의 설치시기와 위치 : 중국의 역사책들에는 한사군이 무제의 침략에 의하여 침략전이 시작된 다음 해인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연구자들도 이 점을 흔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자료들을 자세히 보면 한사군은 같은 해에 동시에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한서』지리지에는 한나라 군의 설치연대, 위치, 호구 수 및 군에 소속된 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미 없어진 진번군이나 임둔군에 관한 내용은 없지만 이 두 군과 같이 설치되었던 낙랑군의 경우와 현도군에 대한 내용이 전해진다.
낙랑군은 한무제 원봉 3년(기원전 108년)에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설치되었음이 나타나 있고, 현도군은 그 다음해인 원봉 4년(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의 중심지로는 옥저성이 소재한 함흥평야 지역을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도군의 중심지를 동가강 유역의 만주 집안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현재 통설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삼국지』 동옥저 조의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지금의 소위 현도 고부가 이곳이다."라는 기사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기사에 유의하여 현도군은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함흥평야에 이르는 교통로를 따라 동서로 길게 설치된 회랑형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앞서 제시한 두 설의 강점을 토대로 한 학설인데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현도군은 토착세력의 거센 저항을 받아 B.C 75년에는 요령성의 영릉진 일대로 옮겨 갔는데 이것이 제 2 현도군이다. 그 후 무순 방면으로 다시금 옮겨간 것을 제 3 현도군이라 한다.
* 창해군
『한서』무제기에 의하면 기원전 128년에 고구려 원주세력의 지배자인 예군남여 등이 28만 명을 이끌고 한에 투항해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 세력 위에 창해군이라는 군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군현을 새로 설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새로운 행정구역을 세우려면 일반 행정, 경찰, 세무, 소방 등 많은 분야의 관청과 관리를 마련해야 한다. 이는 말할 것 없이 돈과 인력이 드는 일이다. 그 옛날에도 하나의 군현을 설치하려면 그 행정단위에 합당한 관리와 군인을 보내야 했고 기존의 군현과 교통로를 개통하여야 했다. 창해군을 설치하기 위하여 길을 뚫는 데 요동지역이 소란할 만큼 주민들에 대한 부역 징발이 많아지고 경비도 엄청났다는 내용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 부담 때문에 창해군을 2년 후에 없앴다는 기록이 역시 전해진다.
창해군의 설치 의도 - 고구려 원주세력들은 고조선의 중개나 간섭을 배제하고 한과 직접 교류하여 발달된 문물을 들여오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으로서는 고구려 원주세력과 흉노의 연결을 막고 강성해진 고조선을 견제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창해군을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 낙랑군과 현도군의 차이 : 점령에 의해 한의 영토에 편입된 낙랑군의 경우와 양자의 필요에 따라 협상과정을 통하여 군현이 설치된 현도군의 경우는 한과 토착주민간의 관계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점령에 의한 결과로서 군현이 설치된 경우, 그곳에서 성장하여 존재하던 족장이나 군장 등은 끝내 한의 정책에 의하여 운명이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현도군에도 한의 관리들이 있었지만 고구려 원주민들은 여전히 자신의 족장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이 같은 군현 설치의 배경과 과정의 차이는 이후 역사에 큰 차이를 가져올 씨앗을 자체에 품고 있었다. 낙랑군이 있었던 평양지역에서는 사람도 많고 좋은 농경지와 교통조건이 있는데도 고대국가가 성립되지 못했던 반면, 척박한 동가강 유역 골짜기에서 고구려라는 강대국이 자라났던 것이다.
* 한사군의 위축과 폐지
현도군의 위축 - 현도군에 편입된 고구려인들은 여전히 종래의 세력집단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곧 현도군의 중국 측 관리들에 대항하여 기원전 75년에 그들을 물리쳐 군현 관리들의 지배거점을 요동방향 쪽으로 쫓아버렸다. 이후에 왕망이라는 자가 중국 한나라를 이어 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흉노족을 억압하자 이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구려는 군현에 직접 통치를 받는 처지가 아니었으나 중국 군현과 여전히 조공무역을 하고 있었고 또한 왕망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만큼 왕망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 내부는 이에 협조적인 종래 연맹의 주도 세력인 소노부와 비협조적이었던 계루부로 나뉘게 되었다. 계루부는 점차 연맹 내의 대표 세력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때의 고구려왕은 계루부의 유리왕이었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강화된 고구려의 저항에 따라 현도군은 더욱 위축되어 점차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갔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이미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다.
* 동이족에 대한 시책 - 낙랑군, 현도군, 요동군
낙랑군은 많은 자원과 인구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화하는 경향이 심화되어갔다. 주로 한반도 남부의 삼한, 백제 나아가 왜 등과 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고구려를 위시한 부여 등 북방에 있었던 동이족과 교류와 대결의 담당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군현들은 중국의 정치적인 변동과 이 지역에 있던 고구려를 위시한 여러 종족집단의 도전을 받아 점차 위축되는 형세가 되었다.
* 후한 말, 공손탁 이래 그의 3대가 요동에 독자적인 정권을 세워 요동군·현도군·낙랑군 지역을 차지 3세기 초에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은 낙랑군 남부에 대방군이라는 새로운 군을 만듦
* 전체적으로 보아 이들 한사군은 중국과 동이족 문물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이이제이 정책을 구사하여 동이족의 국가성장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 삼국세대의 도래는 이 같은 중국의 간섭과 직·간접의 침략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결국 낙랑군과 대방군은 313년을 전후하여 고구려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민족 형성사의 거침돌을 우리 조상들 스스로 제거하였던 것이다.
* 낙랑군, 현도군의 설치시기와 위치 : 중국의 역사책들에는 한사군이 무제의 침략에 의하여 침략전이 시작된 다음 해인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연구자들도 이 점을 흔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자료들을 자세히 보면 한사군은 같은 해에 동시에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한서』지리지에는 한나라 군의 설치연대, 위치, 호구 수 및 군에 소속된 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미 없어진 진번군이나 임둔군에 관한 내용은 없지만 이 두 군과 같이 설치되었던 낙랑군의 경우와 현도군에 대한 내용이 전해진다.
낙랑군은 한무제 원봉 3년(기원전 108년)에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설치되었음이 나타나 있고, 현도군은 그 다음해인 원봉 4년(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의 중심지로는 옥저성이 소재한 함흥평야 지역을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도군의 중심지를 동가강 유역의 만주 집안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가 현재 통설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삼국지』 동옥저 조의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지금의 소위 현도 고부가 이곳이다."라는 기사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기사에 유의하여 현도군은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함흥평야에 이르는 교통로를 따라 동서로 길게 설치된 회랑형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앞서 제시한 두 설의 강점을 토대로 한 학설인데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현도군은 토착세력의 거센 저항을 받아 B.C 75년에는 요령성의 영릉진 일대로 옮겨 갔는데 이것이 제 2 현도군이다. 그 후 무순 방면으로 다시금 옮겨간 것을 제 3 현도군이라 한다.
* 창해군
『한서』무제기에 의하면 기원전 128년에 고구려 원주세력의 지배자인 예군남여 등이 28만 명을 이끌고 한에 투항해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 세력 위에 창해군이라는 군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군현을 새로 설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새로운 행정구역을 세우려면 일반 행정, 경찰, 세무, 소방 등 많은 분야의 관청과 관리를 마련해야 한다. 이는 말할 것 없이 돈과 인력이 드는 일이다. 그 옛날에도 하나의 군현을 설치하려면 그 행정단위에 합당한 관리와 군인을 보내야 했고 기존의 군현과 교통로를 개통하여야 했다. 창해군을 설치하기 위하여 길을 뚫는 데 요동지역이 소란할 만큼 주민들에 대한 부역 징발이 많아지고 경비도 엄청났다는 내용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 부담 때문에 창해군을 2년 후에 없앴다는 기록이 역시 전해진다.
창해군의 설치 의도 - 고구려 원주세력들은 고조선의 중개나 간섭을 배제하고 한과 직접 교류하여 발달된 문물을 들여오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으로서는 고구려 원주세력과 흉노의 연결을 막고 강성해진 고조선을 견제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창해군을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 낙랑군과 현도군의 차이 : 점령에 의해 한의 영토에 편입된 낙랑군의 경우와 양자의 필요에 따라 협상과정을 통하여 군현이 설치된 현도군의 경우는 한과 토착주민간의 관계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점령에 의한 결과로서 군현이 설치된 경우, 그곳에서 성장하여 존재하던 족장이나 군장 등은 끝내 한의 정책에 의하여 운명이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현도군에도 한의 관리들이 있었지만 고구려 원주민들은 여전히 자신의 족장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이 같은 군현 설치의 배경과 과정의 차이는 이후 역사에 큰 차이를 가져올 씨앗을 자체에 품고 있었다. 낙랑군이 있었던 평양지역에서는 사람도 많고 좋은 농경지와 교통조건이 있는데도 고대국가가 성립되지 못했던 반면, 척박한 동가강 유역 골짜기에서 고구려라는 강대국이 자라났던 것이다.
* 한사군의 위축과 폐지
현도군의 위축 - 현도군에 편입된 고구려인들은 여전히 종래의 세력집단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곧 현도군의 중국 측 관리들에 대항하여 기원전 75년에 그들을 물리쳐 군현 관리들의 지배거점을 요동방향 쪽으로 쫓아버렸다. 이후에 왕망이라는 자가 중국 한나라를 이어 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흉노족을 억압하자 이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구려는 군현에 직접 통치를 받는 처지가 아니었으나 중국 군현과 여전히 조공무역을 하고 있었고 또한 왕망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만큼 왕망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 내부는 이에 협조적인 종래 연맹의 주도 세력인 소노부와 비협조적이었던 계루부로 나뉘게 되었다. 계루부는 점차 연맹 내의 대표 세력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때의 고구려왕은 계루부의 유리왕이었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강화된 고구려의 저항에 따라 현도군은 더욱 위축되어 점차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갔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이미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다.
* 동이족에 대한 시책 - 낙랑군, 현도군, 요동군
낙랑군은 많은 자원과 인구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화하는 경향이 심화되어갔다. 주로 한반도 남부의 삼한, 백제 나아가 왜 등과 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고구려를 위시한 부여 등 북방에 있었던 동이족과 교류와 대결의 담당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군현들은 중국의 정치적인 변동과 이 지역에 있던 고구려를 위시한 여러 종족집단의 도전을 받아 점차 위축되는 형세가 되었다.
* 후한 말, 공손탁 이래 그의 3대가 요동에 독자적인 정권을 세워 요동군·현도군·낙랑군 지역을 차지 3세기 초에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은 낙랑군 남부에 대방군이라는 새로운 군을 만듦
* 전체적으로 보아 이들 한사군은 중국과 동이족 문물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이이제이 정책을 구사하여 동이족의 국가성장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 삼국세대의 도래는 이 같은 중국의 간섭과 직·간접의 침략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결국 낙랑군과 대방군은 313년을 전후하여 고구려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민족 형성사의 거침돌을 우리 조상들 스스로 제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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