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축성 동기
3. 축성 계획
4. 화산 축성
1) 행궁건립
2) 성벽
3) 성문
4) 수문
5) 장대
6) 공심돈
7) 각루
8) 포루(砲樓)
9) 포루(鋪樓)
10) 봉돈
5. 마치면서
2. 축성 동기
3. 축성 계획
4. 화산 축성
1) 행궁건립
2) 성벽
3) 성문
4) 수문
5) 장대
6) 공심돈
7) 각루
8) 포루(砲樓)
9) 포루(鋪樓)
10) 봉돈
5. 마치면서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한양 남쪽 100리에 있는 수원에 화성(“수원성”은 일제치하 당시 화성을 낮추어 부른 말로, 현재 화성 본명 찾기 운동 끝에 정식 명칭이 화성으로 바뀌었다.)이라는 성곽을 축조하여 그에 둘러싸인 신도시를 건설하는 대역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전장 6km에 달하는 성곽과 많은 부속건물, 도시 기반시설과 생산 기반시설 들의 총화로 이루어진 계획도시인 수원의 건설은 조선 역사에서 한성 건설 이후 가장 대규모의 도시 건설 사업이었다. 정조 대에 건설되어 현재 수원시의 모태가 된 이들 유적과 문화 유산은 18C기 무렵 조선의 문화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국, 내외적으로 그 중요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현재 이들은 사적 3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있다.
208주년(2004년 현재)을 맞은 이들 문화 유산은 남아 있는 유적과 방대한 관련자료(화성성역의궤 : 화성의 공사 과정을 상세히 적은 일종의 공사 결과 보고서, 순조 원년(1800년) 발행)에 따라 언제나 완벽한 복원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보존해 나간다면 한국 건축의 한 작품이자, 수원시의 상징으로서 그 의의가 클 것이다.
2. 축성 동기
화성은 정조대왕이 비운의 왕세자인, 아버지 사도세자의 유택인 영우원을 1789년 풍수지리학적으로 최길지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천봉한 것을 계기로 발전하기 시작했다.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모신 수원을 이상적인 신도시로 건설하고자 영조 18년 정월부터 20년 8월까지 2년 여에 걸쳐 성곽을 축성하였다.
하지만 이 성곽의 축성 동기를 정조의 부친에 대한 효성으로만 돌리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수원부의 화산은 이미 조선 중기 이후부터 효종의 왕릉 후보지로 거론되어 왔을 정도로,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있었다. 또한 실학자 반계 유형원은 저서 “반계수록” - '군현제'에서 당시의 수원부가 자리한 화산의 기슭보다는 현재의 수원 자리를 지목했었다. 이는 사도세자 천봉과 수원부의 이전이 본격화 되는 1789년보다 120여년이 앞선 실학자의 견해였다. 이러한 반계의 탁월한 견해는 당시 화성의 공역에 참여한 학자들 중 두각을 드러낸 실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실학자들을 우대한 정조 자신이 백 여년 전 반계의 연구에 깜짝 놀라서 포상을 내리기에 이른다.
곧, 반계의 후손을 찾아 반계에게 상을 내린 것과 벼슬을 추증한 사실들을 알리라고 명령을 내린 것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정치적 이유 또한 축성의 동기로 볼 수 있다. 당시 조정은 노론계의 시파와 벽파가 오랜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정조는 즉위 후 탕평책을 써서 이러한 갈등을 어느 정도 무마하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벽파의 세력을 간단히 약화 시킬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벽파 세력은 영조 때 사도 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 섰던 장본인들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규장각의 설치, 탕평책의 시행 등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시파를 대거 기용하고 중용하였다. 또한 사도 세자의 천봉과 그에 따른 수원부의 이전, 그리고 화성 축성 과정에서 철저하게 시파 만을 활용 함으로서 벽파를 배제하려는 의도를 들어내고 있다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한양 남쪽 100리에 있는 수원에 화성(“수원성”은 일제치하 당시 화성을 낮추어 부른 말로, 현재 화성 본명 찾기 운동 끝에 정식 명칭이 화성으로 바뀌었다.)이라는 성곽을 축조하여 그에 둘러싸인 신도시를 건설하는 대역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전장 6km에 달하는 성곽과 많은 부속건물, 도시 기반시설과 생산 기반시설 들의 총화로 이루어진 계획도시인 수원의 건설은 조선 역사에서 한성 건설 이후 가장 대규모의 도시 건설 사업이었다. 정조 대에 건설되어 현재 수원시의 모태가 된 이들 유적과 문화 유산은 18C기 무렵 조선의 문화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국, 내외적으로 그 중요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현재 이들은 사적 3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있다.
208주년(2004년 현재)을 맞은 이들 문화 유산은 남아 있는 유적과 방대한 관련자료(화성성역의궤 : 화성의 공사 과정을 상세히 적은 일종의 공사 결과 보고서, 순조 원년(1800년) 발행)에 따라 언제나 완벽한 복원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 점에 유의하여 보존해 나간다면 한국 건축의 한 작품이자, 수원시의 상징으로서 그 의의가 클 것이다.
2. 축성 동기
화성은 정조대왕이 비운의 왕세자인, 아버지 사도세자의 유택인 영우원을 1789년 풍수지리학적으로 최길지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천봉한 것을 계기로 발전하기 시작했다.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모신 수원을 이상적인 신도시로 건설하고자 영조 18년 정월부터 20년 8월까지 2년 여에 걸쳐 성곽을 축성하였다.
하지만 이 성곽의 축성 동기를 정조의 부친에 대한 효성으로만 돌리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수원부의 화산은 이미 조선 중기 이후부터 효종의 왕릉 후보지로 거론되어 왔을 정도로,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 있었다. 또한 실학자 반계 유형원은 저서 “반계수록” - '군현제'에서 당시의 수원부가 자리한 화산의 기슭보다는 현재의 수원 자리를 지목했었다. 이는 사도세자 천봉과 수원부의 이전이 본격화 되는 1789년보다 120여년이 앞선 실학자의 견해였다. 이러한 반계의 탁월한 견해는 당시 화성의 공역에 참여한 학자들 중 두각을 드러낸 실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실학자들을 우대한 정조 자신이 백 여년 전 반계의 연구에 깜짝 놀라서 포상을 내리기에 이른다.
곧, 반계의 후손을 찾아 반계에게 상을 내린 것과 벼슬을 추증한 사실들을 알리라고 명령을 내린 것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정치적 이유 또한 축성의 동기로 볼 수 있다. 당시 조정은 노론계의 시파와 벽파가 오랜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정조는 즉위 후 탕평책을 써서 이러한 갈등을 어느 정도 무마하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벽파의 세력을 간단히 약화 시킬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벽파 세력은 영조 때 사도 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 섰던 장본인들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규장각의 설치, 탕평책의 시행 등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시파를 대거 기용하고 중용하였다. 또한 사도 세자의 천봉과 그에 따른 수원부의 이전, 그리고 화성 축성 과정에서 철저하게 시파 만을 활용 함으로서 벽파를 배제하려는 의도를 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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