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무녕왕릉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
◎왕
◎지석문의 서예
◎참고문헌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
◎왕
◎지석문의 서예
◎참고문헌
본문내용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表面〉
武寧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月壬辰崩
到乙巳年八月
癸酉朔十二月甲申 安
登冠大墓立志如左
〈裏面〉
丁午丙巳戊辰乙卯甲寅己丑癸子壬亥
영동대장군(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이 나이 62세되는 계묘년 (523)5월 병술 그믐 7일 임신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8월 계유 그믐 12일 갑신에 이르러 안장하여 대묘에 모시고, 다음과 같이 문서를 작성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지석과 그 내용
앞의 지석 내용으로 보면 무녕왕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으로 보아 무녕왕은 죽고 나서의 시호이고, 재위 기간에는 사마왕(斯麻王)또는 융왕(隆王)이라고 불렸던 것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지석의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란 내용은 무녕왕 21년(521) 12월인 중국 양(梁) 무제(武帝) 보통(普通) 2년에 양나라로부터 받은 ‘사지절도 독백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 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이란 직함에서 따 온 것이다. 무녕왕대 처음으로 진동(鎭東)을 영동(寧東)으로 바꾸었다. 또 이 지석의 발견을 통해 무녕왕이 세상을 떠날때의 나이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왕들의 재위 연도만 기록하고 있고, 측위 당시의 나이를 기록한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이 지석의 발굴로 무녕왕의 즉위 당시의 나이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석에 따르면 무녕왕은 재위 23년인 62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 해가 523년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웅략천황 5년인 461년 6월에 무녕왕이 탄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참고해서 볼 때 무녕왕이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는 벌써 40이 되었던 것이다.
이 지석을 통해 백제에서 어떤 달력을 사용했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이 죽은 계묘년 5월 병술 그믐 7일 임신(壬辰)은 백제 무녕왕 23년, 고구려 안장왕 5년, 신라 법흥왕 10년, 중국 양무제 보통 4년으로, 서기 523년에 해당한다. 중국 사서인 『주서』이역열전 백제조와 『수서』동이전 백제조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송(宋)의 원가력(元嘉曆)을 채용해 인월(寅月)로써 세수(歲首)를 삼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송의 원가력은 송 문제 (文帝) 원가 20년(443)에 제정된 것인데, 이 지석에 나오는 월삭(月朔) 및 일간지(日干支)가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송의 원가력이 백제에 전래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죽음을 기록한 이 지석에서 중국 황제의 죽음에만 사용했던 붕(崩)자를 쓰고 이는 그나 즉위 과정에서는 정변을 겪었지만 정치를 그만큼 잘 했기 때문에 그를 높이기 위해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황제의 죽음에서나 쓸 수 있는 붕(崩)자를 썼지 않나 싶다. 한자의 표현에 있어 죽음을 표현할 때 중국 황제에게만 붕(崩)자를 사용하고, 그 밖의 왕이나 귀인에게는 훙(薨)자를 사용했으며, 아랫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는 시(弑)자를 사용했다. 따라서 중국과 교류하면서 책봉까지 받고 있던 백제에서 왕의 죽음에 붕(崩)자를 사용한 것은 자주성의 표현으로서 중국에 대한 책봉관계로 종속된 사이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녕왕릉의 발굴로 인해 우리는 백제 왕실의 장례(葬禮)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무녕왕 지석에는 왕이 계묘년(523) 5월 병술 그믐 7일 임신에 돌아가셨는데 을사년(525) 8월 계유 그믐 12일 갑신에 이르러 안장하여 대묘에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을사년(525)
8월은 왕이 죽은지 만 2년 3개월이 지난 때이다.
『북사』고구려조에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실내에 두었다가 3년이 경과해 길일을 택해서 매장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수서』동이전 백제조에는 백제의 장례가 고구려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장례가 고구려의 그것과 유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죽은 다음 바로 안장한 것이 아니라 3년 정도를 경과한 뒤에 매장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다음 왕이 즉위한 후에 선왕을 매장했음을 말한다. 따라서 왕의 지석은 성왕(聖王) 즉위년에서 3년 사이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525년에 무녕왕은 대묘에 안장되었는데, (그 장소는 바로 지금의 공주 송산리 무덤군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주변의 다른 무덤들도 왕족의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
나머지 하나의 지석에는 왕비의 죽음과 매지(買地)에 대한 내용이 있다. 먼저 지석 뒷면의 왕비 묘지 석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이러하다.
〈表面〉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未朔十二日甲午
改葬還大墓 立志如左
병오년 십이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수(天壽)를 다 누리시고 돌아가셨다.正酉方(정서쪽)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월 갑오일인 12일 甲午에 다시 대묘에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고 지석에 기록하기를 이와같이 한다.
〈裏面〉
錢一萬文右一件
☞ 출토된 무녕왕 왕비의 지석 뒷면과 내용乙巳年八月二日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以前件錢詠土王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不從律令
돈1만문, 이상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위의 금액으로 土王,土伯
土父母, 上下官二千石의 여러 관리들에게 알리어 南申方(남서쪽)의 토지를 매입해서 陵墓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明證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 출토된 무녕왕 왕비의 지석 앞면과 내용
무녕왕의 왕비는 526년, 바로 성왕 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왕비도 바로 무녕왕의 곁으로 가지 못했다. 유지(酉地)dp 가매장되어 빈소에서 3년이 지난 뒤인 529년에 무녕왕 곁에 나란히 묻혔다. 그런데 왕비의 지석에서 중요한 것은 앞면의 내용이다. 어쩌면 무녕왕 지석과 함께 먼저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왕비 지석 앞면의 내용은 왕비가 합장됨에 따라 왕비 지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매지권이 작성된 시기는 525년으로, 무녕왕 지석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왕비는 그 뒤 526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비에 대한 내용은 매지권과 같이 525년에 작성된 것이 아니고, 왕비를 무녕왕과 합장하는 529년에 매지권 뒤에 추기해서 넣은 것이다. 따라서 매지권의 내용이 있는 부분이 앞이 되어야 한다.
이 지석 위에는 한 꾸러미의 중국 돈 오수전이 있었다. 그러나 가
〈表面〉
武寧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月壬辰崩
到乙巳年八月
癸酉朔十二月甲申 安
登冠大墓立志如左
〈裏面〉
丁午丙巳戊辰乙卯甲寅己丑癸子壬亥
영동대장군(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이 나이 62세되는 계묘년 (523)5월 병술 그믐 7일 임신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8월 계유 그믐 12일 갑신에 이르러 안장하여 대묘에 모시고, 다음과 같이 문서를 작성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지석과 그 내용
앞의 지석 내용으로 보면 무녕왕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으로 보아 무녕왕은 죽고 나서의 시호이고, 재위 기간에는 사마왕(斯麻王)또는 융왕(隆王)이라고 불렸던 것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지석의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란 내용은 무녕왕 21년(521) 12월인 중국 양(梁) 무제(武帝) 보통(普通) 2년에 양나라로부터 받은 ‘사지절도 독백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 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이란 직함에서 따 온 것이다. 무녕왕대 처음으로 진동(鎭東)을 영동(寧東)으로 바꾸었다. 또 이 지석의 발견을 통해 무녕왕이 세상을 떠날때의 나이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왕들의 재위 연도만 기록하고 있고, 측위 당시의 나이를 기록한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이 지석의 발굴로 무녕왕의 즉위 당시의 나이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석에 따르면 무녕왕은 재위 23년인 62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 해가 523년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웅략천황 5년인 461년 6월에 무녕왕이 탄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참고해서 볼 때 무녕왕이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는 벌써 40이 되었던 것이다.
이 지석을 통해 백제에서 어떤 달력을 사용했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이 죽은 계묘년 5월 병술 그믐 7일 임신(壬辰)은 백제 무녕왕 23년, 고구려 안장왕 5년, 신라 법흥왕 10년, 중국 양무제 보통 4년으로, 서기 523년에 해당한다. 중국 사서인 『주서』이역열전 백제조와 『수서』동이전 백제조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송(宋)의 원가력(元嘉曆)을 채용해 인월(寅月)로써 세수(歲首)를 삼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송의 원가력은 송 문제 (文帝) 원가 20년(443)에 제정된 것인데, 이 지석에 나오는 월삭(月朔) 및 일간지(日干支)가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송의 원가력이 백제에 전래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죽음을 기록한 이 지석에서 중국 황제의 죽음에만 사용했던 붕(崩)자를 쓰고 이는 그나 즉위 과정에서는 정변을 겪었지만 정치를 그만큼 잘 했기 때문에 그를 높이기 위해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황제의 죽음에서나 쓸 수 있는 붕(崩)자를 썼지 않나 싶다. 한자의 표현에 있어 죽음을 표현할 때 중국 황제에게만 붕(崩)자를 사용하고, 그 밖의 왕이나 귀인에게는 훙(薨)자를 사용했으며, 아랫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는 시(弑)자를 사용했다. 따라서 중국과 교류하면서 책봉까지 받고 있던 백제에서 왕의 죽음에 붕(崩)자를 사용한 것은 자주성의 표현으로서 중국에 대한 책봉관계로 종속된 사이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녕왕릉의 발굴로 인해 우리는 백제 왕실의 장례(葬禮)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무녕왕 지석에는 왕이 계묘년(523) 5월 병술 그믐 7일 임신에 돌아가셨는데 을사년(525) 8월 계유 그믐 12일 갑신에 이르러 안장하여 대묘에 모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을사년(525)
8월은 왕이 죽은지 만 2년 3개월이 지난 때이다.
『북사』고구려조에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실내에 두었다가 3년이 경과해 길일을 택해서 매장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수서』동이전 백제조에는 백제의 장례가 고구려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장례가 고구려의 그것과 유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죽은 다음 바로 안장한 것이 아니라 3년 정도를 경과한 뒤에 매장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다음 왕이 즉위한 후에 선왕을 매장했음을 말한다. 따라서 왕의 지석은 성왕(聖王) 즉위년에서 3년 사이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525년에 무녕왕은 대묘에 안장되었는데, (그 장소는 바로 지금의 공주 송산리 무덤군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주변의 다른 무덤들도 왕족의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
나머지 하나의 지석에는 왕비의 죽음과 매지(買地)에 대한 내용이 있다. 먼저 지석 뒷면의 왕비 묘지 석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이러하다.
〈表面〉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未朔十二日甲午
改葬還大墓 立志如左
병오년 십이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수(天壽)를 다 누리시고 돌아가셨다.正酉方(정서쪽)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월 갑오일인 12일 甲午에 다시 대묘에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고 지석에 기록하기를 이와같이 한다.
〈裏面〉
錢一萬文右一件
☞ 출토된 무녕왕 왕비의 지석 뒷면과 내용乙巳年八月二日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以前件錢詠土王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不從律令
돈1만문, 이상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위의 금액으로 土王,土伯
土父母, 上下官二千石의 여러 관리들에게 알리어 南申方(남서쪽)의 토지를 매입해서 陵墓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明證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 출토된 무녕왕 왕비의 지석 앞면과 내용
무녕왕의 왕비는 526년, 바로 성왕 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왕비도 바로 무녕왕의 곁으로 가지 못했다. 유지(酉地)dp 가매장되어 빈소에서 3년이 지난 뒤인 529년에 무녕왕 곁에 나란히 묻혔다. 그런데 왕비의 지석에서 중요한 것은 앞면의 내용이다. 어쩌면 무녕왕 지석과 함께 먼저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왕비 지석 앞면의 내용은 왕비가 합장됨에 따라 왕비 지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매지권이 작성된 시기는 525년으로, 무녕왕 지석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왕비는 그 뒤 526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비에 대한 내용은 매지권과 같이 525년에 작성된 것이 아니고, 왕비를 무녕왕과 합장하는 529년에 매지권 뒤에 추기해서 넣은 것이다. 따라서 매지권의 내용이 있는 부분이 앞이 되어야 한다.
이 지석 위에는 한 꾸러미의 중국 돈 오수전이 있었다. 그러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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